당과 농부
땅과 농부
신 화 자
길 옆 큰 도로변에 밭을 가진 농부가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런 얘기, 저런 얘기로 일하는 농부에게 말을 건넨다고 한다. 고구마 농사는, 옥수수 농사는, 참깨농사는 이렇게 해야 한다느니, 저렇게 해야 한다느니, 비료는 어떤 게 좋다고 관심을 보이고 지나가면서 잠깐씩 심심치 않게 참견을 한다고 한다. 땅 값이 꽤 나갈 테니 부자라고 땅을 돈으로 보는 이들도 적지 않단다. 젊지도 않으니 일 하는 게 힘들어 보이고 딱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농부는 다만 땅을 들여다보고 땀을 흘릴 뿐이다.
후끈 후끈 뜨거운 바람이 찜 솥에서 뿜어 나오는 것처럼 밭고랑을 지나간다. 잠깐 동안에도 온 몸에 물기를 짜낸 듯 땀이 쏟아진다. 옛날부터 미련한 놈, 배운 거 없고 아는 것 없어서 땅 파는 농부가 제일 불쌍하다고 했다. 요즘은 농부도 공부를 해야 한다. 힘도 좋아야 한다. 머리를 써야 한다. 노년에 소일거리로는 힘에 부칠 것 같은데 그나마 일거리가 있어서 다행이란다. 힘들어도 싫다하지 않고 농사일을 한다. 잡초와 씨름을 하고 벌레와 한 판 승부를 벌이느라 농약 통을 짊어지고 살충제 제초제를 뿌린다. 내 땅이 있어서... 라는 자존심으로 땀을 흘린다. 자식처럼 애지중지 자라고 있는 곡식 채소 포기들을 애정으로 어루만진다. 넘어지고 쓰러진 건 일으켜 세우고 목말라 타죽는 건 내 목숨처럼 돌본다. 호미자루, 괭이자루 힘주어 포기마다 사랑을 담아 쓰다듬는다.
농부의 아낙이 잠을 설친다. 비가 오다 그치기를 사십여 일째를 반복하는 동안 밭에서 참깨가 시꺼멓게 썩고 있기 때문이다. 참깨처럼 새까맣게 속이 타는 듯 먹먹하게 아려 오기 때문이다. 안타깝고 가슴이 아파서 한 숨이 저절로 새어 나온다. 깨꽃을 보면서 잘 나가는 내 자식 바라보듯 대견하고 흐뭇했는데 희망이었던 열매가 여물어 갈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주춤주춤 그칠 새 없이 내리는 것이다. 어느 날 깻 대를 베어 세워놓았는데 또 심심치 않게 비가 내린다. 때를 잘 못 만나고 주인을 잘 못 만나서 참깨는 가엾은 꼴이다. 비가 오는 소리를 잠결에 들으면 내 자식 벌판에 홀로 서서 비 맞는 것 같은 착각을 한다. 자식 버린 심정이 되어 이리 뒤척이며 저리 뒤척이며 잠을 설친다.
들밭에 자라고 있는 곡식과 채소는 농부의 발자국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한다. 땅은 땀 흘린 만큼 정직하게 보답을 한다. 돌보지 않고 버려진 듯 심어 있는 곡식 채소들을 보면 남들 보기 부끄러워서 어린지식 돌보듯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면서 애정을 쏟는 것이다. 논은 빗물을 담아서 물 관리를 하고 강 수위를 조절한다. 농토는 지구의 환경보존에도 큰 몫을 한다.
도시 주변에 논들은 한때 밭이었다가 얼마 후에는 길이 되고 집터가 되었다. 주택과 아파트단지가 되고 길이 생기고 공단이 들어서기도 한다. 도시계획이 실행되면 그 지역에 땅을 가진 이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큰돈이 보이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눈빛이 달라진다고 한다. 땅을 파고 흙을 일구던 순박한 사람들은 큰돈이 눈앞에 보이면 마음이 변해서 애지중지 사랑하고 보듬어 안아주던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다툼이 벌어진다고 한다. 형제들이 갈등을 한다. 도시계획으로 땅이 현금으로 둔갑을 하면 사람들은 속내를 드러내고 싸움을 벌이고 더러는 무서운 행태를 벌이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이는 돈을 앞에 놓고 보니 가족이 제일 무섭더란다. 열 집중에 여덟아홉 집은 어쩔 수 없이 속물이 되더라는 것이다. 속물이 되느니 차라리 아주 적은 소득이기는 해도 작은 행복에 만족하는 농부가 속 편할 수도 있다. 농부는 지구환경을 보존하는 일에도 얼마쯤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면서 아직은 건강하다는 자부심이 있다. 내 땅을 가져서 노년에 소일거리가 있음도 고마워한다.
오늘도 두런두런 비가 내린다. ‘하늘도 무심 하시네.’ 농부의 아낙은 하늘이 원망스러워 중얼거린다.
아직은 내 땅을 가진 것이 마음 든든한 듯 태평스러운 농부가 말한다.
'땀 흘린 만큼 모두가 내 것이라는 기대는 욕심이라오. 우선 땅에 바치고 남은 것을 짐승과 벌레와 나누고, 그리고 남는 것이 농부의 몫이라오.'
때로는 포기할 줄 아는 것도 지혜라고 자연이 깨우쳐 주는 거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