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모리슨의 [술라(1973, 문학동네)]는 작고 얇은 책이어서 금방 읽었다. 모리슨은 시로 쓰고 싶은 것을 약간의 줄거리와 상징적인 인물을 넣기 위해서 굳이 소설로 쓴 것 같다. 그만큼 인물과 줄거리 중심이라기보다는 상징과 은유로 가득 차 있다. 그 당시 흑인들의 경험과 삶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는데, 흑인들이 느끼는 것까지 표현하려니 사건이 아니라 상징으로 나타낸 것 같다.
그들은 모자를 쓰기 전에 모자챙을 다리에 대고 툭 치고는 아무도 지켜지기를 바라지 않는 해묵은 약속처럼 터덜터덜 길을 걸어갔다. p.110
여성들의 삶은 말로 할 수 없이 이상한데, 모두 상징적인 인물이라 공감이 간다기보다는 그 당시 여성의 위치를 그려보게 되는 효과가 있었다. 흑인 여성 최초의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데, 소설가 한강님의 소설들도 상징적인 서술들로 가득차 있길래, "노벨 문학상은 서사보다는 상징을 좋아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술라'의 여성 인물들은 여성의 자유와 자기 결정권, 사회의 편견으로부터 받는 고통 등을 그리기 위해 설정된 인물이어서 여성으로서 동질감을 느낄 만큼 현실적이지는 않다. 여성 인권이 보호되기 이전에는 이랬구나, 하고 과거의 상황을 느끼는 정도이다. 요즘에는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든달까.
여자들은 석 달 묵은 상처를 떠올리며 애인의 음식에 유리 가루를 넣고, 남자들은 음식을 보고 그 속에 유리가 들었을지 모른다고 의심하면서도 너무 더워서 먹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어 그것을 먹었을 만큼 더운 날… p.106
이 봐, 여자들이 원하는 건 자기들의 불행뿐이야. 너를 위해 죽어 달라고 구슬려 봐. 그러면 평생 네 것이 될 거야. p.123
전 다른 누구도 만들고 싶지 않아요. 제 자신을 만들고 싶어요. p.133
지금은 여자가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이 낯설지 않지만, 예전에는 자신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선언'이 되어야 했다. 평생을 순종적으로 살았던 넬이 남자인 치킨을 죽이게 된 순간,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시원한 느낌이 들었음을 뒤늦게 조용히 깨닫는 장면이다. 이 장면이 참 좋았다.
치킨의 손이 빠져나갈 때 그녀가 느꼈던 좋은 기분. 오랫동안 그것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 왜 기분이 나빠지지 않았을까? 그가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그렇게 기분이 좋았을까?” p.243
술라는 실존 인물이라기보다는 여성의 자아에 대한 상징으로 등장한다. 1973년 소설 초판본의 표지 그림을 보면, 술라로 생각되는 여성이 정면을 바라보며 표지 한가운데 당당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다.
술라, 넬과 과거를 함께 했고 현재에도 끊임없이 느낌을 공유하는 친구. 술라와의 대화는 항상 자기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넬이 상대 앞에서 결코 어리석어지지 않는 게 술라 말고 또 있었던가? 술라의 눈에는 부적절한 것도 그저 특이한 것일 뿐 결핍이라기보다는 성격상의 특징일 뿐이지 않았던가? p.137
그녀 안에서 에바의 오만과 해나의 방종이 온전히 그녀만의 것인 뒤틀린 상상력과 합쳐졌고, 그녀는 자신만의 생각과 감정을 탐색하고 오로지 거기에만 매달리면서 남의 쾌락이 자신을 즐겁게 해 주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기쁘게 해 줄 의무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살아왔다. p.171
한 마디로 자아라는 게 없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자신을 입증해야 할 자기 자신으로 죽 남아 있어야 할 어떤 의무감도 느끼지 않았다. p.172
어쩌면 이 여자가 자신의 삶이 온전히 자기만의 것임을 알고 있는 어머니 외의 유일한 여자, 삶을 제대로 다룰 수 있고 그를 못 박아 두는 데는 관심이 없는 여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p.184
저자는 여성의 자아라는 것이 없다고 여겨지는 시기에 대해서 서술하면서, 동시에 여성의 자아라는 것의 아름다움과 특징에 대해서도 위와 같이 많은 고민을 해서 썼다.
너무 까매서 쇠수세미로 꼼꼼하게 꾸준히 문질러야만 없어질 것 같다. 검은색을 제거하면 그 자리에 반짝이는 금색 잎이 있고, 금색 잎 밑에 차가운 설화 석고가 있고, 그 차가운 설화 석고 및 깊숙이에는 이번만큼은 더 검고 따스한 양질토의 검은색이 있다. p.194
바로 위 인용 문구는 술라가 좋아했던 에이 잭스에 대한 묘사이다. 모리슨이 흑인을 얼마나 아름답게 그리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흑인은 핍박받고 존재 자체를 무시당하는 삶을 살아내야 하다 보니 그 공동체 내부의 삶도 질서가 무너지고 혼돈을 겪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여성의 자아보다 더 관심이 갔던 부분은 이러한 핍박받는 공동체의 모습이었다. 그 과거에 흑인공동체(마을)는 사회적으로 핍박받을 뿐 아니라 일자리조차도 주어지지 않은, 생계를 유지할 권리조차 인정받지 못한 공동체였다. 그런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밝고 건강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인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메커니즘과 공동체의식이 존재했었는지가 궁금하다. 이 소설에도 일부의 문장에 드러나 있기는 하지만, 본격적으로 공동체 모습을 다룬 소설은 아니라서, 모리슨이 그런 방향의 소설도 쓴 것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늘 그랬듯 흑인들은 냉담한 눈으로 악을 쳐다 보고 악이 제 갈 길을 가게 놔두었다. p.164
그들의 세계에서 일탈은 은총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였다. 일탈은 추방하거나 절멸시켜야 할 것이 아니었다. p.170
간혹 가다가 내 마음속 목소리를 적은 문장들도 있었다.
그가 무엇보다도 간절히 원한 것은 도로 작업 인부들의 동지애였다. p.121 (주드)
술라는 언제나처럼 가장 사소한 것들 외에는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심각하게 중요한 문제에 이르면 감정에 이끌려 무책임한 행동을 하고… p.146
인간은 그저 연기 같은, 수증기 같은 열망 덩어리일 뿐, 스러지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지친 기대의 상태에 있으면서 술라는 자신이 숨을 쉬고 있지 않음을, 심장이 완전히 멎었음을 알아차렸다. 공포의 주름이 그녀의 가슴에 가 닿았다. 당장이라도 머릿속에서 격렬한 폭발이 일어나고 숨을 거칠게 들이쉴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비로소 그녀는 이제 더는 어떤 고통도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깨닫기보다는 느꼈다. 그녀의 육체는 산소가 필요치 않았다. 그녀는 죽었다. p.214
(묘비명 속) 그들은 죽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어들이었다. 단어조차 아니었다. 소망들, 열망들이었다. p.244
술라는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는 상태로 죽는다. 이는 인간 주체성을 극한까지 밀어부친 서술이라고 생각한다. 난 죽어가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생물적 죽음을 원하는데. 죽음에 대해서 쓴다는 것은 곧 삶에 대해서 쓰는 것이다. 저자는 삶이 그만큼 주체적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토니 모리슨의 작품은 영어로 읽어야 하는데 번역본을 읽은 것이 좀 아쉽다. 영어로 읽을 여력이 없었다. 토니 모리슨의 영어 문장은 그 자체로 시와 같은 운율이 있고 가장 아름다운 단어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영어로 읽었다면 술라도 일정 부분은 시와 같은, 문장 자체가 물결처럼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그걸 느끼지 못한 것이 아쉽다. 번역자를 탓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번역에는 한계가 있다.
<작가의 말>
남자들 사이에 끼지 않을 때, 여자들 간의 우정이란 무엇인가.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흑인 여성들에게 어떤 선택이 가능한가. 대단히 개인주의적이지만 단일 인종으로 이루어졌으며 사회적으로는 정제된 공동체에서 개인주의는 어떤 위험이 있는가. p.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