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죽어감(2018),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sabeth Kübler-Ross)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기정사실이다. 세상에서 가장 명확한 한 가지 사실이 있다면, '우리는 죽는다.'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을 생각하며 수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왜 우리에게 100%의 확률로 일어날 일, '죽음'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지 않는가?
이런 매우 합리적인 생각이 철저히 과학자로서의 퀴블러-로스로 하여금 현실적인 죽음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를 하게 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죽음에 대해 오히려 잘 알고 대비하면 죽어가는 사람도, 주변 사람도 상처를 덜 받고 고통을 덜 느낄 수 있기 때문이고 말이다. 죽음에 대한 언급이 동양보다 더 터부시 되는 서양(?)에서, 그것도 환자를 살려야 하는 의사로서 '죽음'을 받아들이자는 호스피스 운동을 세계 최초로 벌이기에 쉽지는 않았을 것을 생각해 볼 때, 저자는 정말 용감한 분이 아닐 수 없다. (죽어가는 분들을 모셔서 그 이야기를 듣는 행동 자체가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 일인가? 그런 인터뷰를 수없이 하셨으니, 용감을 넘어서 대담하시다고 말하고 싶다.)
죽음에 대한 이해는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시작한다. 저자는 사람의 가장 본능적인 반응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상대의 부정적인 반응을 내리누르고, '사람이 그러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것은, '남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아닌' 이상은 자연적 본능에 대한 억압이다. 이 책은 사실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로 가득차 있다.
집단으로서의 인간은, 거리의 불량배에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다른 집단을 공격하고 파괴하는 방식으로 두려움을 표출하면서 그것을 그들 집단의 정체성으로 삼는다. p.49
그 모든 것들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분노를 발산하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p.107
퀴블러-로스는 죽음의 단계별로 입원한 환자의 인터뷰 사례를 소개한다.
저자는 죽음의 단계를 충격 - 부정 - 분노 - 협상 - 우울 - 수용 - 데커섹시스로 나눈다. 그리고 이 모든 단계동안 지속되는 감정은 '희망'이다. 먼저 부정의 단계에서 환자들은 왜 내가 죽어야 하는지 받아들이지 못한다.
제가 이렇게 죽을 리가 없어요. 이게 하나님의 뜻일 리가 없어요. p.49
무의식의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인지할 수가 없고, 스스로의 불멸성을 믿기 때문이다. p.51
환자가 자신의 방어기제로 부정 대신 고립을 사용하는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그 단계가 되면 환자는 자신의 건강과 자신의 질병, 자신의 죽을 운명과 자신의 불멸성을 마치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허용된 쌍둥이라는 듯 얘기할 수 있게 되고, 따라서 죽음을 대면하면서도 여전히 희망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p.92
… 그녀는 서서히 자신이 처한 상황의 진실을 대면할 용기를 낼 수 있었고, 좀 더 그녀의 입맛에 맞는 음식들을 제공해 줄 것과 마지막을 함께 해줄 것을 우리에게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그런 것들을 가족들이 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와의 길고도 소중했던 관계를 돌이켜 보건대, 우리가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병을 최대한 오랫동안 부정하려는 그녀의 소망을 우리가 존중해 주리라는 것을 그녀가 감지했기 때문이다. p.98
그 사람의 감정이 부정적이고 비이성적이어도 저자는 그가 그런 감정을 가지는 것을 비난하지 않고 다 받아주었다. 환자도 자신의 감정을 소중히 받아주는 상대에게 안도감을 느끼고 존중받는 느낌을 받는다. 다른 사람의 비이성적인 감정을 어떻게 받아줄 수 있을까? 마음이 넓어야 한다는 말로는 좀 부족한데, 그 방법을 좀 알고 싶다.
목수의 도끼가 나무에게 자루를 달라 애원합니다. 나무가 그것을 내어줍니다. (타고르, 길 잃은 새들 p.71) p.155
이 정도는 되어야 상대의 감정을 조건 없이 다 받아줄 수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의사인 저자는 자신이 일하는 큰 병원에서 여러 가지 반대를 무릅쓰고 죽어가는 환자들을 인터뷰했다. 동양과는 다르게 미국에서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더 터부시 되는데, 현대 의학의 힘을 믿던, 책이 쓰여지던 과거에는 더더욱이나 환자의 죽음이라는 것은 의술의 실패로 여겨졌다. 그런 풍토에 반대하여 저자는 죽음을 자연스러운 인간의 마지막으로 받아들이자는 운동을 펼치게 된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는지를 알아야 그들을 편하게 해 줄 수가 있으니까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시작한 것 같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참 힘들다. 그런데 몸이 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얼마나 더 힘들었겠는가. [사람들은 희망이 없는 사람, 아픈 사람을 싫어한다.] 그런데 저자는 수많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회운동은 ‘듣기’가 아닐까 싶다. 모든 변화는 ‘듣기’로부터 일어난다.
“언제 무얼 먹어야 할지는 오직 당신만 알겠지.”라고 말했다. p.113
사람들은 아픈 사람들한테 가까이 오지 않아요. 몸이 아프면 얘기조차 하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대답을 할 수 없어도, 그냥 곁에 있어 주기만 해도,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잖아요. p.132.
여전히 인간답게 살고 싶은 거죠. p.135
그럴 땐 그저 “많이 아프시죠.” 같은 말들이 훨씬 나아요. 고통을 외면하면서 거기다 무언가를 더 보태주는 대신 누군가 고통을 이해해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요. p.141
수녀들에 대한 그녀의 증오는 부분적으로는 그녀를 충분히 받아주지 않았던 어머니와 자매들에 대한 증오의 되풀이이며, 어린 시절에 느꼈던 거절당한 기분의 되풀이 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분노와 증오의 기원을 이해하기보다는 그녀의 행동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실생활 속에서 그녀를 더욱 외면했다. 그녀는 이러한 소외감을, 다른 환자들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파악하고 그들을 대신해서 나서는 것으로 해소할 수 있었다. p.149
일단 환자나 노약자를 '돌보는' ‘보호자’들은 노약자에게 필요한 것을 자신이 더 잘 안다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보호자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노약자를 그저 이상한 존재로 취급한다. 사실 우리는 노약자에게만 그러지는 않는다. 우리 모두 타인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 아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지는 내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은 이 책에서 얘기하듯이, 노약자에게 필요한 것은 노약자 자신이 가장 잘 안다. 그런데 자신의 욕구를 무시받기 때문에 더 큰 정서적 고통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병원에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환자도 결국 그의 인생의 여러 가지 경험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그 사회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면, ‘이상한’ 행동도 고쳐진다는 것이다. ‘이상한’ 행동도 타인에게 이해를 받으면 고쳐진다. 결국 이것도 ‘듣기’이네. 개인적 관계에서의 ‘듣기’. ‘묻기’와 ‘듣기’.
그런 상황에서 환자에게 슬퍼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 한 명을 잃어도 슬픈 게 인지상정인데, 환자는 자기가 사랑하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잃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p.164
그럼요. 만약 살 수만 있다면 그런 수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죠. p.171
유아기는 어떤 요구도 받지 않고 원하는 것은 모두 제공되는 시기다…. 그렇게 우리 삶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일하고, 보상받고, 즐기고, 또 고통받고 난 뒤에, 우리는 처음 출발했던 그 단계로 돌아가고 생애 주기는 그렇게 마무리된다. p.212
“이게 바로 기적인 것 같습니다. 전 이제 준비가 되었고 더는 두렵지가 않아요.” p.243
환자가 수용의 단계에 들어서는 것도 주변의 가족들은 이해해주어야 한다. 이 단계가 가족들에게 더 힘든 단계일 수 있다. 환자가 죽음을 부정할 때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바라고, 환자가 죽음을 수용하면 떠나보내게 되어서 슬퍼하며 가지 말라고 한다. 왜 사람은 상대의 감정과 꼭 반대의 감정이 들까? 내가 평소에도 상대와 거의 무조건 반대의 감정이 드는 것을 느낀다.
환자가 몇몇 친구들만 보겠다고 하고, 그다음엔 아이들만 보겠다고 하고, 마지막으로 아내만 보겠다고 한다면, 그것이 환자가 서서히 자신을 세상과 분리하는 방식임을 이해해야 한다. p.286
그러나 상실감을 그런 식으로 견디어야만 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그들을 조롱하거나 감당하기 힘든 진실을 날마다 그들에게 들이대는 것은 잔인하다. p.297
우리가 그들의 분노를 감내해 준다면, 그것이 우리를 향한 것이건, 죽은 사람을 향한 것이건, 아니면 하나님을 향한 것이건, 우리는 그들이 죄책감 없는 수용의 단계로 큰 한 걸음을 내딛도록 돕는 것이다. 우리가 사회적 금기로 여겨지는 감정들을 표출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난한다면, 우리야말로 정신적-육체적 건강의 약화로 이어지는 슬픔과 수치심 죄책감의 시기를 연장했다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p.300
죽어가는 사람을 (아직 죽지 않았으므로) 살아있는 사람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사회적 금기가 아무리 강해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죽음 앞에서 '금기'를 생각한다는 것은 너무나 보호자만 생각하는 태도이다.
어떤 대단한 어머니는 17세의 딸의 죽음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마음을 먹는다.
어떻게든 이겨내고 이 일을 비극으로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절대, 절대 그렇게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p.352
그리고 그 딸은 어머니의 말에 따라 '종교적 희망'을 가지고 자신의 너무 이른 죽음을 비극으로 여기지 않으며 죽음을 받아들인다. 정말 대단한, 대단한 사람이다.
그런 환자가 자신의 걱정을 나눌 기회가 없을 때 환자는 화가 나고 우울해진다. 환자의 분노는 그녀가 엑스레이실로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간호사 등등에게 가장 잘 표출된다. p.367
그 다음번 만남에서 그녀는 자신 역시 가끔은 “비명을 지르고 싶다.”라고 시인했고 … (돌보아야 할 가족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나자… 자신의 모습은 어느새 끔찍한 몰골에서 최후의 수영과 데커섹시스와 함께 찾아온 평화와 안식, 품위를 지닌 모습으로 바뀌었다. p.369
자신은 죽어가는데, 남아있는 가족들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편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환자들도 있다. 그런 환자들에게는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외부의 도움을 주어야 비로소 마음이 편해지고 자신의 죽음을 돌아볼 수 있다.
적어도 우리가 만난 모든 환자들은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우리는 그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p.422
우리는 냉랭한 사회가 아닌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질문을 다룰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서, 이러한 주제에 관한 대화를 독려하고 사람들이 죽는 날까지 덜 두려워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죽음이란 죽어감이 끝나는 순간이라고 몽테뉴가 말했던가. 우리는 죽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에 수반되는 절망감, 무력감, 소외감으로 인한 죽어감에 대한 두려움이 문제임을 깨달았다. p.426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들의 고민을 들어줄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p.429
그 고통은 어쩌면 분노와 좌절을 안으로 삼켜서 생긴 걸 거예요. 수치스러워하지 말고 그 감정을 밖으로 표출해 보세요. 아마 고통이 사라질 거예요. p.433
그는 응징에 대한 두려움을 완화하는 방편으로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고, 자신이 분노하는 이유를 인식하지 못한 채 애꿎은 의료진과 가족들에게 적대심과 분노를 퍼부었다. p.434
죽음이란 죽어감이 끝나는 순간이라는 의미는 여기 지금 우리 모두 죽어가고 있다는 의미이다. 살아있는 상태는 곧 죽어가고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결국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인간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소외고 외로움이다.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환자가 외롭지 않다고 느끼면 편안하게 될 수 있다. 외로움. 인간에게 왜 외로움이 항상 문제가 되는가? 이 질문에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누가 인간을 사회적 존재라고 규정했으며, 왜 그 규정을 따라야 하는가? 우리가 '외로움'이라고 이름 붙이는 그 감정은 어떨 때 생기는가?
환자의 삶에서 고통이 멈추고, 정신이 꿈이 없는 상태로 빠져들고, 최소한의 음식만 필요로 하고, 주변 상황에 대한 의식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때가 있다. p.438
신체적 활동이 점점 작동하지 않게 되면서 환자는 의식과 모든 것이 없어져버린다. 이 순간이 되면 환자는 고통도 걱정도 다 느끼지 못하기를 바란다.
이 책을 다 읽고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책이 굉장히 실용적이다.'라는 생각이었다. 가장 객관적으로 봤을 때, 우리는 누구라도 주변에서 돌아가시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돌보아드려야 하는지 어떤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하는지 이 책을 통해 조금이라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중요한 것을 우리는 어떻게 한 번도 배우지 못했을까, 정말 중요한 것을 우리 사회는 가르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에는 대가족 속에서 자연스럽게 어른이 하는 것을 보고 배웠을 텐데 우리는 그런 기회가 없다. 나아가서는 나 자신도 언젠가는 죽게 되는데 '메멘토 모리'를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사실적으로 생각해 볼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의 한 문장 한 문장 자체가 의미가 깊어서, 더 덧붙일 말도, 부연 설명도 필요 없는 것 같다. 저자는 죽음과 죽어가는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 다 읽어보니 이것은 그대로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죽음이라는 순간 이후에 대해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니 죽음이라는 순간 이전의 모든 순간은 다 삶이다. 죽어가는 사람도 살아있는 사람이고,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가지는 마음과 똑같은 마음으로 죽어가는, 그러나 지금 살아있는 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이렇듯 단순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제목을 다음과 같이 바꿔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On Life and Liv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