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내용과 형식
이 책은 자본주의 및 개인과 사회의 발전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좀 다르게 접근하기 위해서 이제까지의 연구 방법과 대상을 좀 뒤집어보자는 생각으로 쓰인 것 같다. 서술 방식도 서술한 내용도 독특하다. 연구 논문은 아닌데 수필도 아니고 소설은 더더욱 아닌데, 가끔 소설처럼 보일 때도 있고. 세상 사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지나가며 스케치한 것 같다. 남들이 관심두지 않는 사람들과 물건을 중심으로 말이다. 남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기시 마사히코'의「거리의 인생」이라는 책과 느낌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다만 「거리의 인생」과는 다르게 저자는 쓰고 싶은 얘기를 틀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다 쓴 것 같다.
#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이런 책이 나오게 된 이유는 전 세계적인 사회 체제로 자리 잡은 자본주의가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경제성장이 더 많이 이루어졌는데 왜 안정적인 직장이 점점 없어지는가? 월마트 식의 '구제'가 일반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가격이 매겨지는 시장 안에 물건이 들어오면 물건과 그 물건을 생산해 낸 환경과 단절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이 물건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건 간에, 붙여진 가격만으로 가치가 평가되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이 사람이 생명체로써,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어떻게 살고 있건 말건 간에, 시스템 안에서 돈을 받는 만큼의 역할을 하기만 하면, 그 이상은 아예 관심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인 것과 자본주의적이 아닌 것의 구분선은 무엇인가? 오픈 티켓의 삶은 자본주의 주변의 것이라고 했는데, 자본을 들여서 생산을 하지 않는 송이버섯을 자본주의에 돈으로 팔아서 그런 명칭을 붙인 것 같다. 즉 자연적인 것에서 생겨나서 돈을 받고 팔고 사는 대상이 된 '구제'의 일종인데, 송이버섯의 생산은 인간의 힘으로 조절이 안되고 우연에 맡기거나, 자연 전체의 상태를 바꾸어 놓아야 가능한 것이라는 점에서 희소성이 있는 구제라고 할 수 있다. 그 희소성으로 인하여 상품 가치는 더 높아진다. 그러나 그 가치가 채취자에게 돌아가지는 않는다. 송이버섯을 채취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세계 끝'까지 밀려난 사람들이다. 우연적으로 채집되는 물건이기 때문에, 송이버섯은 이들에게 작은 희망이 된다. '우연'은 아직까지도 '주변 자본주의적'인 영역이다. 독서모임도 송이채집 하는 프리 티켓 같은 주변 자본주의적인 행위이다. (비자본주의 =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 혹은 대가를 바랄 수 없는 것)
# 춤추기
채집인들이 송이버섯 숲을 찾는 방법은 버섯의 생명선을 찾는 것이다. 그들은 감각, 움직임, 방향설정을 이용해서 버섯을 찾기 때문에 춤을 춘다고 할 수 있다. 버섯을 찾기 위해서는 버섯을 찾지 않아야 한다. 버섯이 성장한 흔적, 버섯의 활동선(activity line), 땅이 호흡으로 들썩거리는 것을 찾는다. 캔디 케인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송이버섯이 있지만, 이미 그런 곳은 다른 사람이 다 뒤졌기 때문에 캔디 케인이 있는 곳은 일부러 보지 않는 채집인들도 있다. 일본계 미국인 히로는 국가에 농장을 빼앗기고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으로 복무하고 중장비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일했는데, 1년에 노인들 64명에게 송이버섯을 선물한다. 히로에게는 송이버섯 채집은 개인적 기억 속으로, 돌아가신 어른들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활동이다. 즉, 기억의 춤이다. 미엔인인 모에이 린과 팸 초이는 미국전쟁(베트남전쟁) 때문에 미국에 왔다. 도시의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버섯 채집을 하며 산속에서 라오스를 생각한다. 이들은 다른 채집인이 파헤친 흔적이나 사슴과 엘크가 버섯을 먹은 흔적이 있는 장소를 뒤진다. 송이버섯은 난 곳에서 또 나는 습성이 있어서, 이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버섯 채집인은 이렇게 숲에서 자신만의 춤을 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의 공연을 자신들의 공연에 포함시킨다.
# 번역, 공유지, 감염
오픈티켓에서 벌금을 물리는데 인종 프로파일링이 있는지에 대한 회의가 있는데 산림청과 채집인간의 이런 회의는 베벌리 브라운이라는 활동가 덕택에 생기에 되었다. 브라운의 '번역'은 듣기로 시작한다. 서로 다른 계층이 서로의 말을 '듣기'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제도화된 소외 속에서 일시적 얽힘의 순간들이 있고, 얽힘의 순간에 협력자를 찾을 수 있다. 이런 장소를 '잠복해 있는 공유지(latent commons)'라고 볼 수 있다. 얽힘의 순간은 어디에나 있으나 알아차리지 못하고, 미개발되어 있다. 듣기를 통해 알아차려질 수 있다. 잠복해 있는 공유지는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와의 혼란으로 인식하고, 법과 법 사이의 위반, 감염, 부주의 등을 통해서 촉진되며, 완벽히 통제되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원칙이 있거나 최상의 경우를 발생시키는 자연법이 없다. 대신에 저자는 보물들을 '알아차림'이라는 기술을 실천한다.
'세계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다종의 다른 존재들과 섞일 때 필요한 인내력을 얻는다.'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줄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오염이라는 단어를 썼듯이, 다종 간의 만남이 가져오는 심리적이고 물질적인 꺼림칙함과 불편함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 인간이라는 한 생명체로써 '공유'와 '감염'은 정말 참기 어려운 일이다. 나와 다른 종류와 함께 사는 불편함을 어떻게 견딜 수가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견디는 힘은 이성적인 판단에서 온다. 공존하지만 서로 선을 넘지 않아야 하지만, 서로 선을 넘을 수밖에 없게 되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무감각해진다. 애나 칭의 '알아차림'은 혹시 '무감각'해져야 오는가?
# 책 쓰기의 방식
이 책이 읽기에 어려운 이유는 인류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들 때문이다. 인류학에서는 일반적인 단어, 즉, 구제, 오염, 공유지, 패치, 번역 등이 우리가 아는 뜻이 아니라 사회의 특정한 현상을 의미하는 전문용어로 쓰인다. 그 용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글을 따라가기가 어렵다. 또한 저자는 다학제 간 자유로운 글쓰기의 형태를 스스로 실천하고 있어서, 송이버섯에 대해서 쓰면서, 송이버섯을 둘러싼 사람, 사람들의 관계, 그 사회의 역사, 버섯의 생물학적 특징, 나라 간 문화의 차이까지 모두 자세히 서술한다. 즉, 인간의 삶뿐 아니라 나무나 버섯의 삶의 모습도 인간과 연계를 짓지 않고 독자적으로 많은 페이지에 걸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전체의 흐름을 잡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러한 책 쓰기의 방식은 저자가 가진 태도, 즉, 우리가 '주요한 흐름'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실 '주요하'지 않으며, 주변의 모든 것들이 다 같이 영향을 미친다는 태도를 자신이 글쓰기에 실천한 결과이다.
"고도를 기다리듯이 버섯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