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과 단상
Ⅱ. 사회의 자기 보호
제11장 인간, 자연, 생산 조직
지난 1세기 동안 이중적 운동이 현대 사회를 지배했다. 시장이 팽창했고 이를 가로막는 운동이 일어났으니, 이 둘은 양립할 수 없었으므로 이중적 운동이라고 부르겠다. 시장 체제가 1914년 무렵 최고조로 발전했을 때, 순전히 물질적 차원의 새로운 삶의 방식이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확산되었다. 오언이 예견한 대로 시장경제는 거대한 악을 낳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갔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방어적 행동도 강하게 일어났다.
인간은 노동이란 이름으로, 자연은 토지란 이름으로 시장의 재화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판매되는 상황은 곧 그것들을 파멸시키는 것이었으므로, 반대 운동의 핵심은 토지와 노동에 관한 시장의 활동을 억제하는 개입주의(interventionism)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자기 조정시장에서 화폐란 단지 교환수단으로 사용되는 상품인데, 황금 이외의 것이 교환 수단으로 사용된다면 이는 시장의 바깥에서 통화의 창출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시장의 자기 조정을 방해하는 것이다. 화폐에다가 교환의 수단으로 쓰이는 상품이라는 것 외에 다른 성격을 부여해서는 안되며, 만약 지폐가 쓰인다 해도 지폐는 화폐로 쓰이는 금을 표상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이런 원칙을 근거로 리카도학파는 잉글랜드 은행의 통화 공급을 조직하고자 했고, 시장의 자기 조정을 수호하고자 했다.
따라서, 자기 조정 시장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서 공장 입법과 사회 입법이 필요했고, 토지를 보호하기 위해서 토지 법률과 농업 관세가 나타났고, 상품 허구를 화폐에 적용하는 위험에서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중앙은행과 관리 통화 체제가 필요했다.
다시, 이중적 운동은 사회의 두 가지 조직 원리의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이 원리들은 각각 특수한 제도를 확립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첫째 원리는 경제적 자유주의로, 자기 조정 시장의 확립을 목적으로 자유방임과 자유무역이라는 방법을 쓴다. 둘째 원리는 사회 보호의 원리로 보호 입법, 경제 규제의 방법을 쓴다.
여기서 계급이 중요한데, 중간 계급은 시장 경제를 옹호했으나, 자신들의 경제 활동이 인간과 자연과 문화를 파괴하고, 삶의 방식을 저질화 시키고 있다는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보편적 인간의 이해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다. 19세기말 보통 선거로 노동 계급의 영향력이 커지자, 중간 계급은 자신들의 산업 주도권에 정치적 권력이 내포되어 있음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중간 계급은 정부와 국가를 자기편으로 만들고, 노동 계급은 경제와 산업을 자기 요새로 사용하였다. 즉, 정치 영역과 경제 영역이 분파적 이익을 위한 무기로 사용되었고, 이런 교착 상태에서 20세기에 파시즘의 위기가 나타났다.
이제 19세기 사회사를 결정한 운동의 개략을 1. 경제적 자유주의와 사회의 자기 보호의 충돌로서, 2. 계급 사이의 충돌로서 살펴보고자 한다.
제12장 자유주의 교리의 탄생
경제적 자유주의는 관료주의적이지 않은 것을 지향하면서 시작되었을 뿐인데, 나중에는 자기 조정 시장을 통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바뀌었다. 자유방임도 18세기 중반 이후 최소 두 세대 동안 어쩌다 한번 생기는 일일 뿐이었다. 자유방임이란 단어는 고전파 정치 경제학의 세 가지 교리 즉 노동시장, 금본위제, 자유무역을 대표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자유방임이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국의 면직물 수출도 많은 생산도구 수출 규제 속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자유노동이란 것도 그 당시에 없었다. 공장들은 풍부한 산업예비군을 좋아했을 뿐이다. 1830년은 되어야 자유주의가 거세졌는데, 모든 사람이 구빈법은 천천히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음에도 중간계급의 주장으로 구빈법 수정 법안은 조급하게 시행되고 말았다. 통화와 무역에서도 자유주의가 휩쓸었다. 1815년 생계 비용이 두 배로 뛰자 금본위제가 시작되었다. 자유무역도 동시에 시작되었다. 자동적 금본위제, 경쟁적 노동시장, 국제자유무역의 3가지는 동시에 시행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금본위제 안에서 산업이 살아남으려면 세계 어디서든지 싼 곡물을 들여오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메커니즘이었다. 자유방임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자유무역을 하던 면화 제조업만 하더라도 보호관세, 수출장려금, 임금 보조금의 도움을 빌려 나타난 것이다. 자유방임이란 것 자체도 국가의 법령과 집행을 통해 나타난 것이다. 영국은 반동 세력들이 정치적 압제를 할 때 의회의 입법에 의존했다. 자유시장으로 가기 위해 지속적으로 정부가 개입하도록 했다. 그런데 그러한 경향의 여러 입법 활동들은 여론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방임이 규제를 바탕으로 간신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에 반대한다. 그들은 자유방임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규제가 부자연스럽고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생각이 맞는지 나의 생각이 맞는지는 현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래서 좀 더 이 문제를 정밀하게 얘기해 보자. 1920년대에는 자기 조정 시장이 극에 달아 인플레이션의 재앙을 겪었다. 1930년대에는 미국과 영국이 금본위제를 버렸고, 1940년대는 자유주의 국가들이 파시즘 국가에서 행해지는 관리통화 체제와 통제 무역이 얼마나 새로운 결과를 가져올지 상상도 못 했다. 영국과 미국은 전쟁 앞에서도 자유주의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경제적 파탄이 난 부분에 정부가 개입을 하지 못했고, 전쟁을 준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유주의자들은 모든 문제의 원인을 규제에서 찾는다.
자유주의자들은 규제가 모종의 변증법적 법칙이라는 귀신이나, 이념의 노선을 바탕으로 한 일사불란한 행동이라고 하는데, 그들의 주장이 틀리며, 규제는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사상에 내재하는 부조리함에 의해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것임을 다음 근거들을 들어서 주장한다. 첫째, 반자유주의적 쟁점 자체가 식료품, 가스공장, 광산법, 강제 예방 접종, 굴뚝법 등 잡다한 방향으로 흩어져 있다. 이 다양한 집단들이 서로 모여서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담합을 했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 개별적인 집단들이 산발적으로 운동한 것이다. 둘째, 자유주의적 해결방법이 집단주의적 해결방법으로 전환되기도 했다. 1897년 노동자 보상법도 집단주의적 운동이라고 비난을 받았으나 실제로는 집단이 움직인 것이 아니라 조건과 상황이 바뀌면서 집단이 된 것뿐이었다. 세 번째, 영국과 프러시아처럼 정치적, 이념적 지형이 다른 다양한 나라에서 비슷한 사태의 진전이 일어났다. 네 번째, 자유주의자들도 수출 규제나 노동조합 금지, 반독점법 등 스스로 계약 자유와 자유방임에 대한 제한 조치를 만들기도 했다. 이것도 바로 개입주의이다.
리카도는 시장의 자유방임을 옹호한 학자이다.
12장은 제목이 <자유주의 교리의 탄생>인데, 자유주의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느냐가 아니라 자유주의가 왜 ‘교리’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가, 즉 자유주의의 주장이 왜 근거가 없는가를 설명하는 장이다.
제13장 자유주의 교리의 탄생ㆍ2(계급적 이해와 사회 변화) p.411
자유주의자들이 19세기 사회 정책을 집단주의의 음모라고 믿는데, 마르크스 정당들 또한 분파 집단이 사회 정책을 만들었다고 믿는다. 마르크스도 계급을 정의하는데 리카도처럼 경제적 관점에서만 정의함으로써 조악한 이론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도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사회에서 보호주의가 맡는 기능이 무엇인지를 조망하지 못했다. (p.413) 그런데 사회 분파보다는 사회 전체의 변화(기후 변화, 작황의 변화 등)가 더 핵심이며, 사회 분파는 그 변화가 벌어지는 방식일 뿐이다. 특정 사회 분파가 이기려면 사회 전체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문제는 왜 노동조합이 자신의 소득을 올리려고 했는가가 아니라 어째서 그들의 노력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느냐이다.
(p.419) 계급적 이익이 본질적으로 경제적 성격만 갖는 것이 아니다. 계급적 욕구 충족은 사회적 인정이다. 보호주의가 집단적 이익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과 경제적 이득만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회의 보호는 공동체 전체의 보편적 이익을 위한 것이다. 자본가들이 시장확장을 주도했다면, 노동 계급이 봉건 사회로 돌아가지 않는 방향으로 사회를 지키는 임무를 띄게 되었다. 계급은 변화하고 생성되므로 계급의 경제적 이해라는 것만으로 역사적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
산업혁명이라는 것이 노동 계급에게 ‘악마의 아가리’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데, 실제로는 공장 체제 도입으로 경제 개선이 일어나서 사실 노동자는 실질적으로 더 잘살게 되었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산업 혁명 당시 영국 노동자가 저질 인간인 된 이유는 기존의 사회 체제가 무너지면서 문화적 진공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개인들의 노동의 목표는 문화적 차원에서 결정된다. 아프리카 전사가 노예로 팔려갔을 때, 의식주 측면에서는 상황이 더 나아졌을 수 있지만, 이들이 비참한 착취의 상태임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19세기 후반 인도에 대규모 기아로 인한 사망 사태는 공동체를 해체하고 비축한 창고 체제와 귀족의 의무, 씨족의 연대 등의 과거 사회체제를 모두 없애고, 노동과 토지를 대책 없이 시장에 의존해 버린 결과이다. 인도 촌락에는 흉년은 대비해서 곡물을 비축하는 창고가 있었는데 그 창고의 곡물이 시장에 팔려나간 것이다. 그리하여 흉년에 곡식 창고의 곡물을 나누어 먹지 못하고, 돈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굶어 죽은 것이다.
산업혁명 시 노동자가 사회의 밑바닥이 된 것이 시장체제의 탓이 아니었다고 해서 자유방임 시장이 더더욱 추구되어야 할 목표라는 뜻은 아니다. 집단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만든 원인은 사회 전체의 이익이며, 사회 전체의 이익 가운데 가장 위험에 처한 쪽이 어디냐는 것은 시장이 가한 공격의 방향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경쟁적 노동시장은 인간에게 타격을 가했고, 국제 자유무역은 농업에 위협이 되었고, 금본위제는 생산 조직에 재난이 되었다. 이 세 가지 재난에 대해 1834년~1914년 사이에 각 나라들은 비슷한 패턴으로 사회 제도를 발전시켜 왔다.
<부록> 산업혁명 시 노동자 계층의 비참함, 아프리카 노예 제도 및 부족 말살, 인디언 부족 말살 모두 사회 구조를 파괴하고 문화적 자긍심을 없앤 것 때문에 일어났다.
'사회'의 '탄생'이라는 이 책의 주장이 가장 흥미롭다. 나는 사회가 인간이 존재하는 한 계속 존재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봉건 군주 시대에는 교회 권력과 영주의 권력에 따라서 다른 모든 사람이 좌지우지되는 삶을 살았다. 왕권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봉건 제도에서 사람들이 풀려나면서 '사회'라는 개념이 비로소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에는 당연히 아직 '문화'라는 것이 없었고 말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지향점도 도덕도 의지할 곳도 없이 그저 뿔뿔이의 개인으로 흩어져버렸고, 그런 상태가 인간을 비참한 상태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는 '사회'라는 개념과 그에 맞는 '문화'가 생겨났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새롭다.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영원한 것인 줄 알았던 개념이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는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