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과 단상
제14장 시장과 인간 (p.439)
노동이 상품이 되면 인간들 사이의 유기적 존재가 소멸된다. 아프리카 부족은 굶주릴 일이 없는 공동체인데, 백인들이 빵열매 나무를 베고, 세금을 징수하여 화폐와 노동을 맞바꾸도록 강요하는 방식으로 사회 구조를 없앴다. 굶주림을 노동을 강요하는 채찍으로 쓰기 위해서는 굶주림을 막아주는 공동체는 반드시 해체되어야 하는 것이다. 1847년 10시간 노동법은 사회주의가 거둔 승리가 아니라 공장주들이 곡식의 가격을 낮출 것을 요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주들이 이루어낸 성공이라는 것은 재미있는 지점이었다.
영국 노동계급은 처음 생겨서 스스로의 상태를 파악할 수 없었다. 정치적 차원에서 노동 계급은 1832년 의회 개혁법을 통해서 투표권이 없는 자들로 정의되었고, 경제적 차원에서는 1834년 개혁 구빈법을 통해서 구호 대상 극빈자와 구별되는 자들로 정의되었으나, 그 외에 자신들의 위치를 알 수 없었다. 오언주의 운동과 차티스트 운동은 모두 실패했지만, 시장경제로부터 인간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산업사회 초기로부터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오언주의는 인간을 총체적으로 보고 유니언(협동조합)을 결성함으로써 기계보다 인간을 우위에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노동 시간을 물건으로 바꾸는 노동화폐도 사용했었다. 오언주의는 사회주의의 기초가 되었지만 소유에는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오언주의는 사회를 정치 영역과 경제 영역으로 나누는 것에 반대했다. 공장제 삶은 삶의 전부였고, 임금은 노동자의 삶의 일부일 뿐이라고 보아서 임금이 높지는 않았다. 오언은 뉴레너크에서 공장을 운영하면서 일이 없을 때도 해고시키지 않고. 교육, 문화 등을 제공하면서 노동자가 살게 했고, 그로 인해 노동 생산성도 높아졌다. 그의 이러한 접근 방식은 산업 문제에 대해서 경제를 넘어서는 사회적인 접근의 기초가 되었다.
한나 모어는 9살부터 탄광의 갱도 속에서 일하다가 아버지를 잃고, 하녀로 취직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인간성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는 여자아이를 예로 들어서 개인의 성실성과 인간성을 칭송했던 인물이며, 한나 모어가 말하는 바람직한 인간상에 오언주의는 반대했다. 즉, 인간성으로 이겨내도록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불굴의 인간성 없이도 살 수 있도록 사회를 구성해 내야 한다는 것이다.
차티스트 운동은 1838년~1848년 영국에서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얻어내려던 정치적 노력이었고, 중간 계급은 노동 계급이 정부에 참여한다는 것에 완강히 거부했다. 영국과 유럽의 노동자들의 운동 방향이 달랐는데, 영국의 노동자들은 자발적 노동조합 운동을 했고, 유럽의 노동자들은 입법의 도움으로 투표권을 획득했다.
미제스의 주장을 바탕으로 고용주들이 요구하는 노동의 이동성과 임금 유연성이란 것이 얼마나 고용주들만을 위한 것인지를 설명한다.
마지막 부분과 관련하여 내가 생각한 것은, 노동이 절대로 상품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자유방임 시장의 상품이라면, 상품의 양이 늘어나면 가격이 떨어져야 하는데, 노동력의 가격인 ‘임금’은 마음대로 가격이 떨어져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최소한으로 필요한 돈은 있기 때문이다. ‘노동’은 절대로 상품이 될 수 없다.
땅도 마찬가지이다. 자유방임 시장에서 가격이 결정되려면, 수요과 공급이 맞아떨어져야 하는데, 땅은 공급량이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이미 상품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모든 생산품이 자연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때, 자연이란 것은 공급이 한정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인위적으로 자연을 만들어낼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상품은 결국 자유방임시장의 ‘상품’이 될 수 없다.
제15장 시장과 자연 (p.464)
토지는 인간에게 절대적인 여러 가지 기능(예, 안정성)을 제공하고, 경제적 기능이란 그중 하나일 뿐이다. 튜더 왕조부터 토지를 개인이 소유하는 농업 자본주의가 존재했다. 토지가 자본화되는 데는 3단계가 존재하는데, 첫째는 토지에서 발생하는 수입을 유동화하는 단계, 즉 봉건제에서 벗어나서 토지를 사고파는 단계, 둘째는 전국 규모의 식량과 원자재 생산을 강요하는 단계, 세 번째는 식민지에도 잉여 생산체제를 구축하는 단계이다. 첫 번째 단계는 봉건제 청산으로 인간과 경작지를 떼어내서 재배치하는 단계이다. 1840년대 벤담주의 개혁에서 토지 재산 처분을 강조했다. 둘째 단계에서는 생산요소를 교통을 통해 도시 등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한 단계이다. 지역적으로 조직된 곡물시장이 있었는데, 이제는 전국 규모가 강요되고 자유무역으로 다른 나라에도 팔게 되었다.
토지 소유에 대해서 17세기 보통법은 과거의 토지 제도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고, 성문법은 도시화로부터 농민을 구했다. 오늘날에도 농업 인구 보호의 문제는 제기되고 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대륙들이 개방되며 싼 곡물이 유럽으로 유입되었다. 그래서 각종 곡물 관련법 도입으로 농민들을 보호했다. 외국의 값싼 곡물의 점령에 의해 사회 체제가 파괴되는 식민지들은 제국주의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자유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도 봉건 귀족들이 영향력이 있었던 것은 그들이 토지의 사고 팜을 좀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며, 이 토지들을 근간으로 사람들이 공동체와 영토 개념을 지켰기 때문이다. 스피넘랜드법이 악영향을 끼치기는 했지만, 산업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골 지주들이 제도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지속될 수 있었다. 즉 사회의 어떤 운동이 기득권을 가질 때, 이 운동이 사회 전체에 어떠한 이득을 끼치기 때문에 기득권을 가지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농민들은 사회의 질서를 수호하는 집단으로 떠오르기도 했고, 정치적으로 큰 목소리를 차지했다. 즉, 19세기 농업 보호 운동에서 토지 계급, 군사 세력, 고위 성직자가 동맹을 맺고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원동력으로 농민 계급을 선택했다. (p.479~p.481) 그러나 국가 권력이 강화되면서 농민들에 대한 의존은 약해지고, 도시의 하층민 세력이 미미해지면서 농민은 위세가 약해지고 대지주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자국의 식량을 자국이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농업 부흥운동이 있었다. 완전한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자들이 식량 자급자족에 대한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전쟁이 일어날 리 없다는 주장만 펼쳐나갔고, 그래서 식량 자급자족에 대한 주장은 사라져 갔다. 사람들은 1차 세계 대전으로 시장경제를 통한 상호 의존이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았지만(p.484),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1차 세계 대전 후에 노동자 집단이 시장 원칙을 무시해 버릴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파시즘이 터져 나오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농민들은 시장체제를 수호했고 노동자계급은 시장체계를 깨뜨리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제16장 시장과 생산 조직 (p.487)
영리 기업도 시장 메커니즘을 피하기 위한 피난처를 찾아야 했다. 통화체제 자체에 영리 활동에 대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상품 화폐란 어쩌다가 화폐의 기능을 맡은 상품이다. 그래서 양이 무한정 늘어날 수 없다. 금화와 은화의 수는 정해져 있기 때문에, 생산이 늘어나면 생산품의 가격을 지불할 수 있는 금화가 부족해서 가격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금화 부족으로 인한 격차를 채우기 위해서 신용이나 명목 화폐가 쓰였다. 그러나 나라별 명목 화폐는 외국에서는 쓸 수 없어서 무역의 중심지인 영국에서는 파운드화의 외환 가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금을 바탕으로 하는 금본위제가 도입되었다. 무역과 금본위제가 내수시장의 화폐부족을 일으키고 이런 폐해를 막기 위해 중앙은행이 신용 공급을 중앙에 집중시켜 조절했다. 중앙은행의 등장이 금본위제의 자동적 작동이란 것은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p.493) 화폐는 교환 수단이 아니라 지불 수단이다. 화폐는 구매력이고, 구매할 수 있는 사물들의 수량을 표현한 청구권을 나타내는 계산 수단이다. 이는 시장경제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구성물이다.(p.495) 그런데 이것이 현실과 닮아 있다.
중앙은행은 금본위제의 운영 준칙의 일부였고 중앙은행은 금본위제를 준수했다. 그런데 금본위제를 준수하기 위해서 국내의 물가 수준의 변동이 30프로까지 뛰어오르게 되면서 중앙은행이 이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이 정치 문제가 되었다. 이제 통화 정책은 또 다른 경제 개입이고, 각 나라들은 자국통화를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해졌다. 그래서 새로운 민족주의라는 난공불락의 철옹성을 독점한 중앙은행들이 세워지게 되었다.(p.498) 중앙은행은 명목 화폐를 이용하여 국내 경제와 대외 경제사이의 완충 장치를 만들었다. 1931년 9월 영국의 금본위제 포기와 1929년 대공황이 세계 무역을 휩쓸어 버렸고, 이렇게 금본위제의 최종적인 실패는 시장경제의 최종적인 붕괴가 되어 버렸다. 시장 경제가 시작한 뒤로 백 년이 지나서 자기 조정 시장은 사라졌고, 자급자족의 고립주의를 내세운 정치세력이 곳곳에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와서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앞세워서 새로운 형태의 사회를 주조해 나갔다.(p.500)
-청구권 화폐 이론
화폐는 시장 교환의 매개 수단으로써의 화폐가 아니다. 화폐는 사회적 구매력이다. 화폐를 시장에서의 교환에서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개인이 전체 사회의 생산물의 일부에 대해서 가지는 청구권을 법적으로 표현한 것이 화폐라는 것이다.(p.502) 사회의 구성원은 공동체 전부를 위해서 생산하므로, 자신들의 기여도를 표시하는 것이 화폐이다. 이 이론은 독일, 일본의 파시즘 화폐이론의 근간이 되기도 했다.
-금본위제
영국의 실제 통화체계는 은행권 등의 지권이었다. 통화량이 엄격하게 국제 수지에 의해 결정되므로 상황이 안 좋을 때마다 사람들은 예금 인출을 위해 은행으로 달려갔다. 19세기 금본위제는 자동 조절 메커니즘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1차 대전 후 긴축 금융으로 실업률이 치솟았고, 위험한 나라들은 금본위제에서 탈퇴했다. 금본위제가 무력화되면서 '거대한 전환'이 급속도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