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전환(1944), 17장 ~ 19장

요약과 단상

by 봄눈

제17장 자기 조정 기능, 망가지다 (p.507)

1879~1929년까지 보호주의로 시장의 자기 조정 기능이 망가졌다. 그러나 미국에 대해서라면, 경제적 자유주의자는 시장의 능력을 보여주며 미국으로 들어왔다. 미국에서 1세기 동안 노동, 토지, 화폐가 자유롭게 거래되었지만 보호가 필요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노동, 토지, 화폐가 무한정이었기 때문이다. 서부개척, 이민으로 땅과 노동력이 무한 공급되었다. 그러나 무한 공급이 끝나자 미국에서도 시장의 폐해에 대한 보호가 시작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단단한 민족 정체성이라는 개념은 그 나라의 화폐로 표현되었다. 명목화폐의 가치를 뒷받침해 주는 것은 금이 아니라 주권 국가의 권력이었다. 자유주의적 계몽주의자들 또한 국민국가가 경제적, 정치적으로 얼마나 결정적인 존재가 되었는가를 의식하지 못했다. 보호 조치들은 서로 결합되어 어디에서나 새로운 상황을 똑같이 만들어냈다. 통화 정책은 사회 전반에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고, 국제적으로도 화폐는 거래를 성사시키고 지불, 부채, 청구권의 역할을 하면서 많이 통용되었다. 시장의 자기 조정 기능이 망가지면 정치적 개입이 일어났고, 국제적인 차원에서도 시장의 불완전성을 보완하기 위해 정치적 방법이 쓰였다. 무역을 하는 나라들은 서로 불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외채를 갚을 수 없게 되는 일이 벌어지고, 그 나라의 통화 체계가 무너지고, 외국으로부터 더 이상 높은 이자를 뜯기지 않기 위해서 채무 지불을 중단해 버리는 나라들도 생긴다. 채무를 받기 위해 외국의 해안가에 해군이 출동되어 무력시위를 벌이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그래서 유럽 나라들은 식민지가 무역에 참여하도록 끌어들였고, 동시에 함대 없이는 식민지와 무역을 유지하기도 힘들어졌다.


제18장 체제 붕괴의 긴장들 (p.521)

이 시기에 전 세계는 비슷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국내 시장이 불균형으로 움직이면 실업, 국내에서 정치 세력이 교착 상태에 빠져 꼼짝 못 하게 되면 계급 간의 긴장, 국제 경제에서 수출 교역이 악화되면 대외 투자 손실 등 외환 가치에 대한 압력으로 이어졌다. 국제 정치에서 나타나는 긴장들은 제국주의 경쟁 행위라고 부를 것이다.

금본위제 아래에서 실업 문제를 해결하려고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 이리저리 해보아도 항상 통화의 외환 가치 하락의 결과를 낳았다. 그 당시 경제학자들은 압도적 다수의 정부들이 보호주의적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에 경제 문제가 일어난다고 주장했지만, 어째서 모든 나라들이 보호주의를 채택하지 않을 수 없는가에 대한 이유는 묻지 않았다.

자유주의자들은 1880년대 초 서양에서 제국주의적 열정이 생기고 이것이 부족적 편견을 부추겼으며 이러한 제국주의적 감성이 1차 대전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 같이 못 가진 나라들이 제국주의를 폭발적으로 분출시켜서 2차 대전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가와 제국이 항상 팽창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어떤 도시도 국가도 무조건 영토를 넓혀야 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는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제국주의는 무엇이나 먹어치우며 확장해 왔지만, 국가가 언제나 팽창적이라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그 근거는?) 식민지는 싼 물건을 들여올 수 있는 곳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시장에서 식민지와 누가 더 싼 물건을 만들어 파는가 하는 경쟁 상대가 되었다. 그래서 식민지를 유지하는 것이 국가의 부담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국제 무역은 전 지구로 확산되었지만 동시에 보호주의 제도도 함께 확산되었다. 왜냐하면 금본위제가 요구하는 고정환율제의 부담이 커질수록 보호주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나라들은 시장 경제의 강제를 회피할 수 없어서 끔찍한 결과를 맞을까 봐 자신들끼리 자유무역을 하기보다는 먼 곳의 시장을 노리게 되었다. 이 나라들은 자신들도 식민지처럼 인간 저질화와 부족말살까지는 아니더라도 실업의 재앙과 산업 구조의 조정과 같은 변화를 겪으며 고통을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들끼리 무역하지 않고 먼 식민지로 진출하게 되었다.

1차 대전 후의 중유럽 국가 등은 전쟁 보상비라는 대단히 인위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전쟁 보상비는 국가 전체의 부채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안에서 마르크화의 안정이 꼭 필요했다. 세계무역에서 그 어떤 나라도 금본위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실업 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중앙은행과 수입관세를 방패로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나라가 수입 관세를 도입하면 다른 나라들은 보호 장치가 없는 먼 지역으로 찾아가 새로운 시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제국주의란 유럽 강대국들이 정치적 보호 장치가 없는 시장으로 자신들의 무역을 확장할 특권을 얻기 위한 싸움이었다. (p.535) 국내 시장에서도 보호주의가 확장됨에 따라 자기조정은 사라지고 특정 이익 집단들이 서로 대치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었다.

19세기 문명은 첫째로는 일정한 결정론의 메커니즘에 지배된 문명이었고, 둘째로는 경제적 성격을 띠는 문명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하나로 엮어서 인간이 경제적 동기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도출하는 경향이 있다. (p.536) 그러나 어디까지나 자기 조정 시장과 사회 보호 운동이라는 양자택일 사이에서 움직이는 것이 그 메커니즘의 결과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 결정 메커니즘이 그토록 엄밀한 것은 인간에게 물질적 동기부여가 강력한 힘을 갖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원인이 잘못 설정되었던 것이다. (p.537)

전 인류를 장악하고 있던 것은 새로운 행동 동기가 아니라 새로운 메커니즘이었다. 끝까지 살아남은 마지막 시장 제도였던 금본위제가 해체되면서 전통적인 세계 경제는 소멸했다. 전 세계는 영혼도 없이 물질적 안녕을 위해 달려가는 세계가 되었다. 그리고 계급 간의 갈등이 등장한다.


내가 이 책을 열심히 읽어보려는 것은 무솔리니나 히틀러 같은 파시스트들이 어떻게 권력을 얻게 되었는지를 경제적인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책이 아닐까 하는 희망에서이다.


III. 진행 중인 전환

제19장 인민 정부와 시장경제 (p.541)

1920년대 국제 체제가 무너지자 초기 자본주의의 문제들이 다시 생겨났다. 제일 먼저 생겨난 문제는 정부가 국민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경제에 대한 정치의 개입 주의라는 것이다. 최초로 개입주의가 문제가 된 것은 스피넘랜드법, 신구빈법, 차티스트 운동 등이다. 스피넘랜드법은 경제에 대한 개입주의에서 나온 것으로 노동 시장의 창출을 막았다. 당시에도 시장의 질서라는 것은 없었지만, 타운샌드, 맬서스, 리카도 등은 스피넘랜드법이 시장질서를 훼방 놓는다고 낙인찍었다. 이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스피넘랜드법은 한 세대 더 존속하면서 도시의 높은 임금에 맞서 농촌을 보호하는 울타리 역할을 했다. 그 후 개혁 의회는 노동 시장에 어떤 개입도 없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스피넘랜드법을 철폐했다.

신구빈법 이래 1834년에 실업자들이 구제해 주지 말아야 될 빈민으로 처음으로 등장했다. 노동자들은 모든 예속에서 해방되었지만 굶어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노동을 하게끔 떠밀리는 존재가 되었다. 이들에게 무료로 먹을 것을 주면 임금체제가 무너진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차티스트 운동이 일어나서 인민의 대표에게 행정권을 주자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는 극심한 반대에 부닥쳤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헌정주의(법에 정해진 대로 한다.)는 상부 권력자의 불법적인 사적 소유권에 대한 침해를 막는 것이었는데, 100년이 지나자 인민으로부터 산업자본을 보호하는 역할로 그 의미가 바뀌었다. 헌정주의라는 것의 개념이 변화하는 가운데 1748년 몽테스키외는 권력분립의 원리를 고안했는데, 이것은 인민들이 자신의 경제생활을 관장할 권력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데 사용되었다. (p.546) 한편 영국에서는 노동계급에게 아예 투표권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다.

노동에서와 마찬가지로 통화에서도 문제가 생겼다. 벤담은 인플레이션은 사업가들에 대한 조세요, 디플레이션은 사업에 대한 교란 행위라고 생각하며, 사적 소유권 침해임을 인식했다. 고전 경제학자들은 화폐도 자유시장의 손에 맡겨 두어야 한다고 여전히 주장했지만, 화폐 정책이 경제 상황을 악화시키는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래서 사회 보호와 통화 가치에 대한 개입은 완전히 동일한 문제가 되었다. 임금 수준 상승과 직접적 인플레이션은 통화 가치를 위협할 중요한 변수로 여겨지게 되었다. 1920년에 이 두 가지에 대한 개입이 정치의 핵심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통화의 안정성과 재정의 건전성은 같은 것을 의미했다.

1925년 영국의 통화 가치는 항상 불안했다. 1931년 대공황으로 인한 지속적인 금 유출로 파운드화의 가치가 심각하게 떨어졌고 임금을 내리거나 금본위제를 탈퇴해야 되는데 노동당은 둘 다를 하지 못했고, 다른 정당들이 들어서서 결국 금본위제까지 탈퇴하게 된다. 이런 비슷한 상황은 유럽 국가들에서 모두 나타났다. 각국의 노동당은 임금을 내리지 못해서 통화 가치를 구출하지 못했고, 권력에서 모두 물러나야만 했다. 이런 나라들에서 결국 문제 상황은 통화 가치와 재정 균형을 중심에 놓고서 자본가들과 노동자들의 양편으로 갈리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예들을 볼 때 통화 가치를 수호하고 인민을 위한 정책은 모두 망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미국은 적절하게 금본위제를 탈퇴하여 공황 시기에도 금융지배가 벌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미국이 세계무역에 의존하지 않은 독립성을 가지고 있었던 나라이기 때문이다.

파업은 정상적인 협상 무기이지만, 파업이 벌어지면 사회에 돌아오는 생산물도 줄고, 노동자들 자신에게 돌아오는 몫도 줄기 때문에 사회적 공분의 대상이 되었다. 만약 노동이 진짜 상품이라면 최고의 가격을 얻을 때까지 판매를 거부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 파업이야말로 노동을 상품으로 보았을 때 나올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결과가 아니겠는가?

1920년대 세계가 국제통화 체제 복구를 최우선 과제로 삼게 된 이유는 국제적인 자본 이동이 많았기 때문이다. 국제신용은 전쟁 배상금 등과 같은 국제적 채무, 세계 물가 수준 안정을 위한 대부 등 국제신용 메커니즘이 광범위하게 사용된 것이다. 제네바 회담에서는 통화 가치 안정을 위해서 다른 문제들은 종속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디플레이션으로 통화 가치를 안정시킨다는 10년 동안의 헛된 노력을 하는 중에 자유시장은 회복되지 않았고 자유 정부만 희생되었다. (p.559) 디플레이션을 이루기 위해서 권위주의적인 정부가 개입해 주기를 바라는 분위기가 되었고, 그 결과 민주 세력들은 약화되었고, 그들의 약화가 파시즘적 파국의 현실화를 이끌었다.

사회주의란 자기 조정 시장을 극복하기 위해서 시장을 민주적 사회의 아래 복종시키고자 하는 것이고, 이는 산업 문명의 성격이었다. 하지만 생산 활동이 개인의 화폐수익으로 남지 않게 하겠다는 점에서, 또 생산 도구에 대한 개인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주의의 위상에 영향을 끼친 2개의 변화가 일어났다. 첫째, 시장체제가 거의 붕괴되었고, 둘째,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경제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산업도 없고, 인구 대다수가 문맹이고, 민주주의 전통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상황이었다. 유럽에서도 여러 노동자 정당들은 이미 사회주의적이었다. 노동쟁의란 일상적인 것이지만, 정치 영역과 경제 영역이 서로 분리된 상태에서는 이러한 충돌이 공동체 전체에 큰 파괴력을 가지게 된다. 1920년대 노동 세력은 자신들의 숫자를 무기로 삼아서 싸웠고, 자본가들은 산업을 바탕으로 대치했다. 이렇게 경제와 정치 모두가 마비되는 상황이 되자 이런 상태를 벗어날 쉬운 길만 제공해 줄 수 있다면 누구에게라도 지도권을 넘기게 되었다. 파시즘이라는 해결책이 나타날 때가 무르익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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