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만한 당신(2016), 최윤필

by 봄눈

함께 가만한 당신(2016), 최윤필, 마음산책


이 책은 정말 재미있다. 한국일보의 최윤필 기자는 신문의 부고란에 올라온 사람들 중에 멋진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일생을 조사해서 쓴 칼럼을 신문에 게재했다. 그 칼럼들을 모아서 <가만한 당신>이라는 시리즈로 묶어서 내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사람 한 명 한 명이 개성이 뚜렷한 삶을 살았다. 필부필부가 아니다. 위인은 아닐 수 있지만, 삶에 대한 뚜렷한 철학을 가지고 그 길로 나아간 사람들이다.


다음은 판매량과는 관계없이 읽힐만한 작품들을 고집스럽게 출판해서 그 덕에 명작들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도록 한 출판인, 억울하게 수감된 사람들 편에 서서 무죄 판결을 받아낸 법조인이다. 그는 세상의 정의가 쉽게 달성되지 않음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안다. 큰 목소리를 내는 달변가가 아니라, 실제로 매일매일의 지루한 노동을 통해서 정의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피터 오언] 내가 평생 만나온 모든 출판인을 통틀어 피터는 가장 일관적이고도 예측 가능하게 예측 불가능하고 짜증 나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늘 그에게 돌아가곤 했다. p.43

[마이런 벨덕] 아마도 그는 정의의 파도란 저절로 솟구치는 게 아니라 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어쩌다 한 번 간신히 솟구치는 것이라고 속으로 말했을 것이다. p. 123


다음은 세상을 자기 꼴리는 대로 신나게 산 사람이다. 촉이 좋고 운이 좋은 사람이다. '살아있는 매 순간을 좋은 시간으로 채우는 것'이란 말을 내 마음에 담고 싶다.

[펠릭스 데니스] 더 많은 무지개와 노을을 좇았어야 한다고 후회하며 떠나고 싶지는 않다. p.164

그의 인생철학은 한마디로 '살아 있는 매 순간을 좋은 시간으로 채우는 것'이었다. p.165

미국 경제 월간지. <아이엔씨 닷컴> 인터뷰에서 그는 '무관심'이 협상 성공의 관건이라고 말했다. 협상 결과에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면 당신은 그 협상에서 이길 수 있다. 상대에게 그런 인상을 주도록 애쓰라는 게 아니라 실제로 협상장을 박차고 나와라 '노딜'이야말로 진짜 딜이다. No deal is a must-do deal. p.166


[찰스 바소티] <시카고 트리뷴> 기자에게 그는 "정치인이란 당신이 뭔가를 공짜로 주면 절대 당신을 존중하지 않는 족속들이다. 그들이 존중하는 건 '거래'다".라고 빈정거렸다고 한다. p.172

세상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사람들은 모두 '공짜로 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 아니었던가?


‘가만한’이란 무슨 뜻일까? 가만하다는 것은 조용하고 움직임이 많지 않다는 의미가 떠오른다. 그런데 그 사람의 일생이 가만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렇게 자신의 업무와 가치관에 따라 철두철미하게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을 가만하다고 하는 이유는, 이 사람들이 떠벌리지 않고, 타인의 이목보다는 자신의 목적이 더 중요하여 사람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고, 세상 그 누구보다도 남다르게 인생을 산 사람들이어서 그런가? 연예인이나 정치가의 의미 없는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뉴스나 난무하는 요즘에, '가만하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생길 지경이다.

nse-2083969898770350577-1000008314.jpg <함께 가만한 당신> 책 뒤표지

[수잰 코킨]

“(30초의) 단기 기억에만 의존해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헨리가 겪은 일은 틀림없는 비극이지만, 정작 헨리 자신은 좀처럼 고통스러워 보이는 일이 없었으며 항상 헤매고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헨리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순간을 살았다.” p.199

40, 50년대는 약물치료로 호전되지 않는 정신 질환의 유망한 요법으로, 뇌조직 파괴와 절제술이 시도되곤 했다. … 자전거를 타고 놀다 머리를 다친 뒤 시작된 몰레이슨의 간질 증상은 나이가 들면서 잦은 대발작(전신 강직 발작)으로 악화해 갔다. … 독한 항간질약에 내성이 생겨 …. 3년 뒤 스코빌은 그의 양쪽 관자놀이에 구멍을 뚫고 내측두엽(해마구, 편도체, 내후뇌피질 등 포함) 각 4센티미터가량을 잘라냈다. 수술로 그의 간질 증상은 완화됐다. 하지만 기억 형성 능력(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전환하는 능력)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몰레이슨도 자신이 처한 상황과 감당해야 할 세월을 알긴 했겠지만, 두고두고 곱씹지는 않았을(못했을) 것이다. p.201

그는 영문 모르게 노발대발 화를 낼 때도 있었고,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다. 남한테 피해만 끼친다.”라며 고함을 질러대다가 다가서는 이에게 발길질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의 기억력)과 불화할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누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해도, 사라진 기억을 속절없이 더듬으며 “나는 지금 나와 싸우고 있어요.”라고 순하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코킨은 저 시간들을 함께 보내며 그와 함께 늙어갔다.

그리고 100여 편의 논문과 10여 권의 책을 썼다. p.203

…. 자신의 뇌도 몰레이슨(의 뇌가 기증된) 캘리포니아대학교에 기증했다. p.205


뇌과학자인 수잰 코킨은 헨리 몰레이슨이라는 환자를 평생 돌보았다. 코킨은 몰레이슨과 연구 대상자와 의사로 만나게 되었으나, 몰레이슨이 부모 사망 후 외톨이가 되자, 그가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평생을 돌보았다. 몰레이슨은 장기 기억과 단기 기억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살아있는 증거였으며, 연구 대상자였지만, 인간적인 연민을 느껴 평생을 돌본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뇌 연구에 일생을 건 것으로 보인다. 아무도 수잰 코킨을 위대한 과학자로 기억하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자신의 연구 대상자의 삶을 죽을 때까지 보살펴주었다. 인간의 무지에 의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한 인간을 끝까지 책임지고 보살펴주었다는 데 있어서 그 어느 과학 업적보다도 가치 있는 역할을 했다.


[패트릭 화이트필드]

땅과 말하는 자, 자연에 의한, 자연을 위한, 자연과의 농업

퍼머컬처(Permaculture)는 '영속하다'의 permanent와 농사의 agriculture를 합친 단어다. '영구농업', '영속농업' 쯤으로 번역되는 저 용어는 1970년대 말 호주 태즈메이니아대학교의 빌 몰리슨(Bill Mollison, 1928~), 데이비드 홈그렌(David Holmgren, 1955~) 교수가 쓰기 시작한 이래 환경과 농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는 꽤 친숙한 낱말이 됐다. 퍼머컬처는 생태농업의 한 갈래로, 생태계를 모델로 농사 공간을 디자인함으로써, 자연 에너지와 유기체의 상호작용을 통해 농작물과 가축 등이 저절로 생장하게 하자는 농법이자 운동이다. 퍼머컬처 농부는 봄마다 땅을 일궈 이랑을 만들지 않고 씨앗이나 모종을 심지도 않는다. 화학비료는 물론 부엽토나 유기 거름으로 지력을 돋우지도 않고, 약초 효소를 만들어 농약 대신 뿌리지도 않는다. 나무와 관엽식물, 초본식물이 어우러진 자연의 숲이 인간의 개입 없이도(아니, 개입하지 않아야) 해마다 싹을 티워 열매를 맺듯이, 먹을 수 있는 식물들이 그런 숲(혹은 정원, 혹은 과수원)을 이루게 디자인해 농사를 짓는 방식이다. p.313


이 책을 읽으면서, 최윤필 기자는 어떻게 이렇게 다방면의 지식을 쌓아서 거의 모든 분야의 전문가의 일생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었을까 놀라웠다. 물리학, 문학, 의학, 역사, 농업, 경제, 건설, 법학, 교통, 등 사회의 모든 분야를 조사하고 공부해서 매번 글을 써냈다. 전문가가 아니니 잘못된 내용을 쓸까 봐 매번 기사 쓰기가 힘들었을 텐데, 책 뒤쪽의 어마어마한 양의 참고 문헌을 보면, 최윤필 기자가 모든 분야를 다 이해하고 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4297425-1024x682.jpeg 한스 몸젠(Hans Mommsen)


[한스 몸젠(Hans Mommsen)]

진실이 중요하다, 의도주의보다는 사실을 추구한 역사학자

그는 히틀러를 나약한 독재자(weak dictator)라 규정한 독일의 역사학자다. 그는 홀로코스트가 히틀러와 나치 소수 권력자들이 장기적으로 기획한 결과가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전시 상황에서 하위 관료와 군부가 우발적으로, 하지만 경쟁적이고도 효율적으로 자행한 만행이며, 히틀러는 사후 승인 혹은 묵인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나치 제3제국이 히틀러 개인이나 국가노동자당의 지배하에 일사불란하게 조직화된 국가가 아니라고, 스탈린의 소비에트 전체주의 국가와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몸젠은 80년대 독일 '역사가 논쟁'을 비롯한 숱한 논쟁의 선봉에 섰다. 그는 당시의 주류적 견해, 즉 제3제국의 탄생과 전개를 독재자의 이데올로기와 핵심 하수인들의 의도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의도주의(intenionalism)적 관점이 사실을 왜곡하고 제3제국의 모든 책임을 히틀러와 극소수 전범들에게 떠넘김으로써 나치즘을 떠받친 독일의 엘리트 관료들과 보수 군부, 법원 등등 하위 사회조직과 구성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타협적 해석이며,.... p. 321

... 일상적인 일이 되면서 (홀로코스트도) 더 이상 예외적인 일이 아니게 된 거였다. 전쟁이 난관에 봉착하면서 분권화한 하위 관료, 군사 집단이 "자신들의 근면성과 조직적 효율성을 과시하고 정치적 긴요함을 입증하려는" 과정에서 홀로코스트가 시작됐고, 히틀러와 나치 지도부는 다만 사후적으로 승인했다는 게 몸젠을 비롯한 기능주의자들의 판단이었다. 그 과정을 몸젠은 '누진적 과격화(Cumulative Radicalization)'라는 개념으로 설명했고, 그것이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현실화(Realization of the Unthinkable(1983년 저서의 제목이기도 하다.)'했다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결정하는 걸 기피했고, 입장 역시 불분명했고, 오직 개인적 권위와 지도자로서의 특권을 유지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 어떤 면에선 나약한 독재자였다." 그러므로 우파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듯 나치즘을 스탈린 전체주의와 대등하게 놓거나 에른스트 놀테처럼 굴락 수용소와 홀로코스트에서 모종의 인과성을 도출하려는 시도는 그로선 수긍할 수 없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국가는 철저히 소련 공산당의 지배하에 있었던 반면, 나치 치하에서 국가사회주의당과 국가는 권력(히틀러의 신임)을 두고 경쟁하는 관계였다. 영국의 현대사학자 이언 커쇼(lan Kershaw, 1943~)는 나치의 독재(The Nazi Dictatorship)라는 책에서 몸젠의 관점을 집약하며, 제3제국 외교 정책의 비일관성과 위기에 대응하는 임기응변식 국내 정책, 명령계통의 비체계성 등을 근거로 "히틀러도, 나치 정권의 그 누구도 유토피아의 모호한 이상 외에 장기적이고도 정밀한 마스터플랜을 갖고 있지 않았다. 제3제국은 서로 난투하는 경쟁 기구들의 잡동사니일 뿐이었다."라고 썼다. p.326

나치 시대 연구가 '히틀러 현상' 연구와 동일시되고 나치의 모든 사악한 결정과 에너지가 오직 히틀러에게서 비롯된 것처럼 과장함으로써, 홀로코스트를 가능하게 했던 독일 사회 내부의 광범위한 요소들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몸젠은 주장했다. 저 주장들은 '의도주의' 학자들과의 논쟁 속에서 더욱 정교해졌다. 히틀러의 인종 개념을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개념에 대한 답변 즉 "계급 살해(스탈린 체제의 굴라크-강제노동수용소)로부터 인종 살해(홀로코스트)의 의도가 근원적으로 출현했다"라고 주장한 에른스트 놀테'에 대해 몸젠은 나치 범죄를 스탈린 전체주의에 대비해 '상대화'하려는 시도라고 비판하며, 홀로코스트는 '19세기 독일 보수 관료 집단의 이념과 사상 속에 내장돼 있던 반유대주의가 나치즘과 만나 폭력적으로 발현된 특이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소비에트 전체주의와 나치 범죄를 포개려는 시도는, 냉전 체제하에서 공산주의와 나치 범죄를 버무려 함께 폐기하려는 시도일 뿐이며, 그럼으로써 선량한 독일 역사를 걸러내 민족주의의 부활에 힘을 실으려는 기획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역사가의 임무는 독일 국민들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 '쓸 만한 버전'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대화에 끊임없이 개입함으로써, 보다 긍정적인 국민적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행간에서 짙게 드러나듯 그의 나치즘 연구 배면에는 독일 민족주의에 대한 경계심이 놓여 있었다. p.328


역사학자 몸젠 부분은 내용 자체가 참 흥미로웠다. 다른 여러 책들에서도 홀로코스트는 당시 독일 국민 전체가 저지른 범죄자 없는 범죄라고 주장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것은 독일인의 잘못을 들추어내서 그들을 단죄하고자 함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인간 사회가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서 거대한 범죄에 가담하게 되는지를 배워서 이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범죄자 없는 거대한 범죄가 일어날 확률은 어쩌면 점점 더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최윤필 기자는 한국일보에 '가만한 당신'을 연재하고 있다. 이 연재는 내가 아는 한 가장 훌륭한 기사 시리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최윤필 기자는 그 어느 소설가보다도 위대한 소설가라고 생각한다. 인물의 마음속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그 사람의 일대기를 써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