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 철학 7(요약과 단상)
알튀세르는 맑스주의를 진화시킨 사람으로, 1971년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이라는 논문을 써서 큰 여파를 일으켰다.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호명한다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호명 테제는 유명하다. 칸트 이후로 서양 철학에서는 주체를 스스로 구성하는 자율적인 위치에 놓고 있었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호명 테제가 주체를 구성’당하는’ 위치에 놓음으로서, 주체들이 지배자들이 퍼뜨리는 생각에 쉽게 설득당하는 이유를 설명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설명으로는 주체가 반역하고 반항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었는데, 이에 대해 지젝은 ‘이데올로기는 공백을 남기는 방식으로만 주체를 장악하고, 그 공백에서 주체의 저항과 반역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테리 이글턴은 이데올로기의 부름에 호응하는 것 자체가 이미 주체의 행위라고 하며, 주체는 역시 개인에게 있다고 알튀세르를 비판한다. 돌라르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믿게 될 것이다’라는 파스칼의 문장을 언급하면서, 이데올로기의 부름에 뒤돌아보는 주체, 주체 이전의 주체가 필요하다고 비판한다.
이에 대해 알튀세르는 주체 이전의 주체, 믿음 이전의 믿음이 목적론적 관념론의 환상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탄생’과 ‘돌발’을 분명히 구분한다. 자본주의라는 것이 생겨나기 전에도 ‘자산’, ‘과학기술’ 등은 이미 있었지만 서로 고립된 채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없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의 우연한 마주침을 통해 자본주의의 형성을 규정할 수 있다. 돌발을 무시하고 과거를 투영해서 회고적 방식으로 기원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주체 효과’이다. 즉, ‘사회 효과’가 요소들의 결합을 연구하는 것이라면, ‘주체 효과’는 요소들의 우연한 만남이 만들어내는 효과를 무시한다. 이러한 현상은 사람뿐 아니라 사회나 민족에도 존재한다. 민족이란 것 자체가 근대에 들어서나 생긴 개념인데, 단군 신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주체 효과의 예이다.
’왜 호명당한 주체가 돌아서는가?’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알튀세르는 이 질문 자체가 주체의 환상에 빠져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개인이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과 마주침으로써 어떤 동일성을 부여받으면, 그 동일성을 과거를 향해 투영함으로써 마치 이전부터 자기 주체가 그러했던 것처럼 믿게 된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그 자신의 외부를 알지 못한다. (p.225)
즉,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에 의해 강제된 동일성이라는 결과를 주체가 자신의 과거를 향해 투영해 자신의 원인으로 만드는 목적론적 전도의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전도를 통해 주체는 자신이 자기의 원인이고, 자율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허풍선이 남작>이 하늘을 날으면서 자기 머리를 자기 손으로 위로 잡아당기면서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게 했다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p.227)
이데올로기적 동일화는 결국 공백을 남기게 되는데 라캉은 이를 extimate(외밀하다)라고 표현했다. 알튀세르와 라캉 모두 공백에 대해서 동의를 했지만, 그 공백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차이가 있다. 라캉의 경우에는 이 공백이, 실제가 잃어버린 기표이다. 아이가 언어의 장 안에 진입할 때 기표가 하나 억압되는데, 그것이 아이에게는 실제이다. 그러나 알튀세르에게 실제는 복잡한 사회적 전체이자 계급 투쟁의 구조이다. 라캉에게는 실제가 있지만 원환의 구조 속에 갇혀 있고, 알튀세르에게는 구조와 더불어 또 다른 구조가 곁에 나타나는 것이다. 다른 구조가 바로 사회의 복잡한 전체 및 계급 적대의 구조, 즉 실재이다. (p.231)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저항이나 반역은 자기 안에 갇혀 있는 이데올로기의 동심원적 구조를 탈중심화시키고 그 중심에 실제를 가져다 놓는 것이다. 그는 '피콜로 극장'이라는 에세이에서 베르톨라치 원작인 '우리 밀라노 사람들' 파리 공연을 분석하는데, 돈과 허영을 위해 살겠다고 외치는 니나는 무대 주변에 있고, 무대 가운데에는 꿈도 희망도 없는 서브프롤레타리아의 삶이 이어지는 방식으로 공연된다.
이것이 브레히트가 말하는 '소격 효과'의 핵심이라고 그는 말한다. 아버지의 멜로 드라마적 도덕 의식을 딸이 거부하게 되는 것처럼, 인정사정없는 돈과 쾌락, 자본의 법칙을 그대로 직시하라는 것이다. 진정한 저항은 주인공의 대립된 적이 됨으로써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과 적 사이의 허구적 대립 구도를 깨고, 그 대립 구도 자체를 만들어내는 실제를 무대의 중심에 가져다 놓는 것이다.
주체에 의해 부인되는 그 공백을 가시적으로 만들어 주고, 그것을 본 관객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비판적 사유와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저항이나 반역은 이데올로기를 떠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내부에서 달성된다. 이데올로기 자체가 갈등과 투쟁의 장소라는 것, 맑스가 내린 정의를 알튀세르가 계승하는 것이다.
그런데 알튀세르는 맑스를 그대로 계승함으로써 지배이데올로기 안에 있는 갈등은 보지 못했다. 이것을 해결한 사람이 발리바르이다. 발리바르는 지배이데올로기가 피지배자들로부터 광범위한 인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피지배자들의 승인과 거부가 들어 있을 수 밖에 없는 장소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이데올로기는 상급자에게 복종하라고 말하지 않고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평등과 복지를 외치는 것이다. 다만 그 목적을 위해서 우리가 희생해야 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데올로기적 반역은 목적을 위해 참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을 당장 실현하도록 집단적으로 시도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정식화는 맑스주의 이데올로기론의 많은 난제를 해결하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