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 철학 8(요약과 단상)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와 자기 변형의 기술 - 허경
푸코는 인문학 분야에서 영향력이 큰 철학자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첫째,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오해. 푸코는 스스로 자신을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규정하는 데에 대해 명시적인 반대를 표명했고, 그의 주요한 저술은 오로지 근대, 모던 시기만을 탐구 대상으로 삼고 있다.
둘째, 해체주의라는 오해. 데리다의 해체는 ‘탈구축’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며, 푸코는 데리다와의 논쟁 끝에 그와 거리가 멀어지므로 탈구축과는 관련이 없다. 푸코는 근대를 연구했기 때문에 문제의 재구성 혹은 재문제화가 더 중요하다.
셋째, 포스트 구조주의로 보는 오해. 포스트라는 단어의 의미와는 별개로 푸코를 구조주의자라고 보는 것은 1969년 지식의 고고학까지일 뿐이다.
넷째, 푸코를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로 보는 오해. 푸코는 진보적이라는 공산당에서도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 보수적인 쁘티 부르주아적 관습을 유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푸코가 평생 지향했던 정치적 노선은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좌파적 테제의 정립이었다. 포스트를 후기라고 해석한다면, 푸코는 후기 마르크스주의라고는 부를 수 있다.
다섯번째, 푸코가 비합리주의라는 오해. 푸코는 전통적 합리성은 거부한다. 곧 절대적이고 객관적이고 한계가 있는 합리성 자체는 이러저러한 역사적 사건에 의해 구성된 합리성의 한 형식에 불과할 뿐, 합리성 자체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푸코는 합리성의 객관성, 보편성, 절대성, 유일성만 부정하는 것이며, 푸코의 합리성은 다수의 형식, ‘합리성들’이라는 형식 아래 나타난다.
푸코는 자신이 에이즈로 죽을 것을 알고 자신의 저술을 직접 정리했다.
1. 현재의 진단, 오늘의 역사
푸코는 1969년 지식의 고고학을 끝으로 언어학적, 기호학적, 구조주의적 사유와 결별하고 니체적 계보학을 채택했다. 그 핵심은 오늘에 대한 관심, 곧 현재를 진단하려는 것이다. 니체 계보학은 인식이란 것 자체가 힘을 가지려는 의지의 발현이기 때문에, 어떤 관점도 자신의 이익을 벗어난 객관적, 보편적 인식이란 없다는 것이다. 개념이라는 것 자체가 권력에의 의지에 의해 구성된 관점의 산물이며, 진리는 없고 해석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적 정직성이다.
니체는 소크라테스 이전이 그리스의 황금 시대였다고 말하면서, 소크라테스와 그리스도교가 모든 것을 잘못된 방향으로 돌려놓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민주주의, 자유주의, 공리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모두 병든 현상이라고 본다. 니체에게 올바른 사유는 반시대적인 고찰일 수밖에 없으며, 반시대적인 고찰은 현재에 대한 진단 행위다. 그러므로 니체, 푸코적 사유에서 철학함이란 오늘 여기 우리의 문제를 다루는 활동이다.
2. "나는 달력도 지도도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고전 철학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등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문제를 탐구했지만, 니체 이후에 철학은 오늘, 여기, 우리의 문제를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푸코가 달력과 지도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얘기한 것이다.
푸코는 달력도 지도도 없는 것은 전혀 없다고 주장하고, 따라서 객관적 역사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광기, 섹슈얼리티, 영혼에도 역사가 있다고 생각한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영원한 진리인 것처럼 말을 했지만, 사실은 그 시대의 에피스테메, 즉 한 시대, 한 공간이 갖는 인식론적 가능 조건에서 나온 말이라고 주장했다.
3. 나는 어떻게 오늘의 내가 됐는가?
푸코는 ‘~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는 어떻게 구성됐는가?’라고 묻는다. 니체와 푸코는 자신의 주장도 하나의 관점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실은 없고 관점만 있다는 관점주의자들이다. 관점주의는 자기 관점의 편파성, 비논리성, 부당함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입장은 상대주의라고 여겨질 수 있는데, 니체는 절대와 상대의 구분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상대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논점 선취의 오류다. 즉, 그리스도교의 내세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한테 ‘너 그런 말 하면 지옥 간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한 오류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플라톤적 진리, 영원불변의 진리는 19세기 메이지 시대에 들어온 번역된 말이며, 진리라는 말 자체도 일본어이다. 무엇이 옳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렇게 느껴지도록 조건화된 것이다.
푸코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각각의 진리 개념들이 구성된 역사 탐구를 목표로 삼는데, 이런 역사를 ‘진리의 정치사’라고 부른다.
이것은 서구 합리성의 한계와 조건을 밝히는 지식, 권력, 윤리라는 세 영역과 고고학, 계보학이라는 방법론을 조합한 것이다.
1. 지식의 고고학
16세기 이래 서유럽 문화에는 오직 두 번의 단절로 나뉘는 3개의 시기, 에피스테메, 즉 인식론적 장이 존재한다. 세 개의 인식론적 장은 르네상스 시대는 유사성, 고전주의는 재현, 근대는 역사이다. 유사성은 ‘호두를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라는 생각의 방식을 말한다. 재현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라는 그림에서, 왕의 권력을 시녀들의 시선 등으로 보여주는 방식이다. 지식을 고고학에서의 지층안에 묻힌 화석들처럼 생각하며, 하나의 개념은 자신이 속하는 지층 내부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것이 에피스테메 변화의 이유나 동력은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새로운 단계, 곧 권력의 계보학 시기로 이행한다.
2. 권력의 계보학
푸코는 이전 지식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서 포괄한다. 1960년대 에피스테메라는 개념은 70년대의 장치라는 개념에 포섭되고, 지식은 권력으로 나아가면서 권력 지식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진다. 푸코의 권력은 거시적 차원의 정치가 아니다. 푸코는 권력을 근본적이이고 미시적인, 사소하며 일상적인 것으로 보며, 거시적인 권력은 이런 무한하게 작은 미시적 권력들의 효과로서 드러난다고 본다.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에서는 신체 형벌과 처벌의 시대를 지나서 감금의 시대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감금이란 권력을 통해서 신체를 장악하는 것이다. 푸코가 왜 감시와 처벌에 관심을 가졌냐하면, 피에르 뤼비에르라는 어머니와 동생을 죽인 사람이 정신착란이기 때문에 처벌에서 제외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전에는 정신병이 있어도 사람을 죽인 상황이면 무조건 처벌을 했는데 이때부터 정신 착란인 경우에 벌을 감해준 것이다. 또 푸코는 감옥 정보 그룹을 창설해서 수감자의 생활을 조사하는 활동을 했다. 이 두 가지 상황을 바탕으로 <감시와 처벌>을 썼다.
권력은 신체를 순응하게 만든다. 근대의 권력은 겉으로는 민주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실제로는 신체를 기계처럼 움직이게 만든다. 즉, 신체를 유용하게 만드는 권력이다. ‘파놉티콘’의 원리도 이 책에서 다루고 있다. 또한, 권력은 소유물이 아니라 행사되는 것이다. 권력은 억압적인 것이 아니라 생산적인 것이다.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다. 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죄인을 처벌하는 것보다 감시하는 것이 경제적이다.)
푸코는 기존의 권력관이 권력을 경제적인 것이라고 보았던 것에 반대하여, 권력은 실체적이지도 않고 경제적이지도 않은 것이며, 주어진 상황에 존재하는 요소들 사이에 전략적 배치로서 새롭게 정의한다. 권력은 담론적 및 비담론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전략적 상황의 총체, 곧 권력관계이다.
3. 윤리의 계보학
푸코의 윤리는 보통 생각하는 윤리가 아니라 에토스가 갖는 원래의 의미, 즉 개인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를 의미한다. 인간은 자신이 행복한 만큼만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다. (자기 배려의 두 가지 종류로는 플라톤적 회귀, 기독교적 회귀가 있다. 이는 해방으로서의 자기로의 회귀이다. 자기의 직접적 확장은 절제의 체제, 신체를 훈련으로 이끄는 체제, 사유를 통한 훈련으로 가능하다고 말한다.
파레시아(Parrhesia)는 모든 것을 말하기, 권력자 앞에서 진실이나 신념을 말할 수 있는 용기, 발언의 실천, 신념과 말이 정확히 일치하는 말하기이다. 파레시아는 세 가지 차원으로 정치적, 윤리적, 철학적 가치를 지닌다. 자기 배려의 윤리는 개인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이다. 자기 배려가 있어야 파레시아를 실천할 수 있다. 그러나 나쁜 파레시아는 머리속에 드는 모든 생각을 무분별하게 말하는 것이다. )
윤리의 계보학은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되었는가라는 주체화, 주체의 역사적 형성을 다룬다. 문제화란 주체가 만들어지는 주체화, 대상이 설정되는 대상화, 그 사이의 인식이 확립되는 인식론화, 이 모두가 합해지는 포괄적 용어이다. 문제화는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로 만드는 과정이다. 모든 것이 역사적, 정치적으로 구성됐다고 보는 푸코에게 정상이란 없다. 정상적인 것은 기존에 정상을 밀어내고 정상의 자리에 새롭게 등극한 어떤 무엇이다. 이것이 정상화이다.
푸코는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어떻게 오늘의 내가 되었는가?’를 묻는다. 이러한 모든 작업들은 자기 변형을 위한 것이다. 즉, 철학의 목적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일탈이다. (글쓰기는 자신을 변형시키거나 소멸시키는 행위로서 상당히 위험하다. <담론과 질서>에서는 푸코는 회의주의자라는 친구의 의견이 나온다. 부정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보는 사람이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또한 푸코는 레비나우와의 대화에서 ‘진정한 해방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1969년 지식의 고고학 서문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얼굴을 갖지 않기 위하여 쓰는 사람이, 물론 나를 포함하여, 존재한다. 내가 누구인지 내게 묻지 말기를, 그리고 그대로 남아 있으라고 내게 말하지 말기를. 그런 질문은 우리의 서류를 지배하는 호적계의 도덕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쓸 때, 이 도덕이 우리를 자유롭게 내버려두기를. (<지식의 고고학(2000)>, 41쪽)
(괄호)안의 내용은 다른 책들의 내용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