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1985), 아녜스 바르다

by 봄눈

방랑자(원제: 지붕도 없고 법도 없이)라는 영화는 매력적이다. 별다른 줄거리도 없는데 멈추지 않고 계속 보게 만든다. 감독의 대표작이기도 하고, 감독 스스로도 가장 마음에드는 영화라고 했다고 한다. 누벨바그 영화로서는 흥행에도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는데, 이 영화의 매력이 뭐길래 나도 사람들도 그렇게 매력적이라고 느꼈을까?


일단 여자 주인공 '모나'가 예쁘다. 얼굴이 강인해보이면서도 앳되고 예뻐서 영화를 보지 않을 때도 그 뽀얀 피부 속 반짝이는 선한 눈이 자꾸 생각났다. 그리고 히치하이킹을 해준 차에서 라디오가 없다고 불평을 하는 등(기사가 듣기 불편한 말을 해서라는 이유도 있지만), 매사에 당당하다. 예쁜 여성이 아니면 이 영화의 스토리 자체의 개연성도 없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많은 차들이 그녀를 태워 주면서 스토리가 진행되었는데, 아마 중년 남자였으면 히치하이킹이 성사되지 않으므로 아예 시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년 남성 방랑자였다면 그런 만남과 방랑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제목은 '젊고 예쁜 방랑자'로 수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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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좋았던 이유 중 또 하나는 여주인공이 끝없이 걷고 또 걷는 트레킹 샷 장면이 내 마음속 풍경을 보여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는 사람들은(나는) 방랑을 하지 못한다. 방랑을 하면 영화에서 보여주었듯이 죽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철학자는 방랑을 하면 외로움이 집어삼켜서 죽거나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방랑자는 외로워서 죽는 것이 아니다. 춥고 배고파서 실제로 죽는다. 추위와 영양실조로 육체가 병들기 때문에 죽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방랑은 못하지만 마음속에선 배낭을 메고 계속 걸어가는 여자아이가 있다. 그런 동질감 때문에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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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는 모나가 길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의 인터뷰가 나온다. 그들 중 몇몇은 자유와 방랑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들은 떠나지 못하지만 실제로 노숙인은 안전보다는 자유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떠날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방랑자에 대해 가지는 일반적인 시선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이 보는 모나의 결핍, 추위, 배고픔은 그들의 결핍이지 모나가 느끼는 결핍이 아니다.(영화모임 토론 내용)' 예를 들어, 본인이 정착을 그리워하기 때문에 모나를 가정적으로 보는 목에 자물쇠를 찬 다비드, 애인과의 따뜻한 관계를 그리워해서 모나 커플을 동경하는 할머니의 수동적인 가정부 욜랑드(프랑스의 유명배우), 선생을 하다가 양치기가 된 철학자(양치기는 모나와 비슷해보이지만 가장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양치기는 미래를 생각하지만 모나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 모나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은 모나가 자기 기준으로 살지 않는 것을 비난하는 것이다. 양치기의 입장에서는 진심으로 따뜻하게 대해준 것이지만, 권위주의적인 느낌, 나만 옳다는 느낌 때문에 모나는 집과 땅을 받았어도 떠나게 된다.), 모나와 교감하고 잘해줘도 자신만의 선이 있어서 집으로는 들이지 않는 플라타너스를 연구하는 란디에 교수(사회적인 나이스함을 보여주는 인물, 그러나 감전사고 후에 모나를 찾는다. 그런데 교수가 모나를 찾는다고 하더라도 그 후로 어떻게 하려고?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가 나온다. 이 영화는 어쩌면 모나가 아니라 모나가 만난 사람들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였을 수도 있다. 그다지 커다란 나쁜 짓을 하지 않는 방랑자를 죽게 만드는 사회를 보여주는 영화, 어쩌면 악의 평범성을 보여주고, 사회의 관용과 관대를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영화 모임에서는 '공동체가 방랑하는 사람을 어떤 식으로 포용하고 어떻게 뱉어내는가?', '모나는 사람을 그렇게 무시하면서 왜 그렇게 사람의 호의에 기대서 사는가?' 라는 의견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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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 바르다는 <아녜스 바르다의 말>이라는 책에서 그녀가 모든 것에 '아니요.'라고 외친다고 거칠게 말을 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몇 번 '아니요.'라고 말을 안 한 경우가 있다. 란디에 교수에게도 먼저 떠나겠다고 하지 않았고, 포도밭에서 일하는 튀니지 일꾼 아순과도 함께 남아 일하고 싶어했다. 후자의 경우 그녀가 떠난 이유는 다른 일꾼들이 그녀를 여자라고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포도밭 일꾼이 나중에 그녀가 매던 목도리를 두 손에 꼭 쥐고 그녀를 그리워하는 장면을 보면 그 일꾼은 그녀를 정말로 좋아했던 것 같다. 정말로 좋아했으니 함께 있을 때 진심으로 그녀에게 잘해줬겠지. 그녀도 그걸 알았기 때문에 거기에 남고 싶어했던 것이 아닐까. 안타깝다. 그럼 반대로 말해서 다른 곳에서는 아무도 그녀에게 진심으로 잘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방황을 한 것일까? 그야말로 엉덩이가 멋지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만 만났기 때문에 방랑했다는 것일까? 철학자는 집과 밭까지 제공했는데도 남지 않았다. 철학자가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잔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주 '동물적'으로 자신에게 편하면 남고 싶어했고 조금이라도 제재가 가해지면 떠났다.

모나가 치매 할머니댁에서 보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남들은 말이 안통하고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할머니라고 생각하는 할머니가 모나와 얘기할때는 매우 정상이며, 조카가 자신을 양로원에 보낼 것이고 집을 차지할 것이라는 것까지 다 알고 있다. 모나는 살아있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그 순간 살아있는 사람이라서 할머니와도 숨길 것도 없이 대화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아무 계산도 하지 않는 사람이어서 방랑이 가능하다. 오히려 우리가 얼마나 생각하고 계획하고 살아가는가? 내가 내 삶을 얼마나 계산적으로 살고 있는가, 사람을 만날 때 얼마나 계산을 하고 한마디라도 내뱉는가를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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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에 걸린 모나가 영화의 마지막에 파이프에 발이 걸려서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날 수도 있었는데 스스로의 삶에 대해 뭐라고 생각했길래 다시 일어나지 않았을까라는 의견이 영화 모임에서 나왔다. 그런데 내 생각에 그녀는 삶에 대해서 생각하는 캐릭터가 아니다. 삶을 그때그때 내키는대로 체현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방랑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그녀가 넘어졌을 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는 커녕 마약과 병에 지쳐서 정신을 잃고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혹은 일어나려는 '부자연스러운'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방랑의 실체는 물질적이다. 방랑이 생각이 있어서 하는 것이라고, 방랑을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이미 '생각(계획, 기대)'이 끼어드는 한 모나와 같은 삶은 살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이 동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한다. 이 영화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대로 매일을 생존해가는 캐릭터를 창조해 낸, 자신이 '동물'임을 그대로 살아내는 인물을 보여주는 영화다. 모나는 말을 하지 않는다. 말은 '생각'을 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다.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나가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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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는 그저 '길가에서 혼자먹는 샴페인이 맛있'기 때문에 방랑을 하는 아름다운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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