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 한나 아렌트

by 봄눈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에서는 광범위하고 깊이 있는 논의가 지속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내가 모든 부분을 잘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에게 다가온 내용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히틀러라는 광인을 지도자로 삼은 것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정상적인' 독일 시민들이 유대인 인종학살이라는 악행을 협력적으로 수행했는지, 나는 그 상황을 이해해보고 싶었다.

아이히만은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유럽 전역의 유대인을 죽음의 캠프로 수송하는 업무의 총책임자로, 전쟁 후 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탈출하여 신분 세탁을 한 후 남미에 숨어 살았다. 그러다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길 원했고 마침내 이스라엘 첩자에게 체포되어 이스라엘 법정에 서게 되었다. 이 사건을 기록하고자 한나 아렌트는 이스라엘로 가서 이 책을 쓰게 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책표지

아이히만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고,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느끼기 위해서는 단지 과거를 상기하기만 하면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살았던 세상과 그는 한때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8000만 명으로 이루어진 독일 사회가 동일한 방법, 동일한 자기기만, 거짓말, 어리석음을 통해 현실과 사실성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지금 아이히만의 정신 속에 깊이 스며들게 되었다. 이러한 거짓말들은 해마다 변했으며, 종종 서로 모순을 일으키기도 했다. 109쪽


아렌트는 법정에서 심문받는 아이히만이 언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를 포함한 독일 사회 전체가 자기기만을 하고 있던 상황과 지속적으로 변하는 자기기만의 특성을 얘기하고 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지인인 유대인을 수용소로 만나러 가는데, 아우슈비츠가 들어가면 모두 죽는 곳인 줄 알면서도 수용자와 인간적인 만남을 했다고 믿고 수용소 안에서의 그의 노동의 양을 줄여주었다고 자신이 하는 일이 악행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유대인은 5일 후 총살당한다. 이러한 자기기만은 모든 업무 처리 과정에도 존재하는데, 악을 위해 일하면서도 자신은 주어진 업무를 하는 것뿐이라고 자신을 기만한다.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지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 대부분의 우리의 모습과 비슷한 진부한(?) 인간의 모습이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전문 영역인 유대인 문제가 이민 문제로 머물러 있는 한 그는 곧 실직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128쪽


인종 학살이라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 과정을 하나하나씩 짚어가면서, 끔찍한 사건인데도 대단히 특이하고 악랄한 사상과 과정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고루한, 즉, 누군가가 실직하지 않기 위한 노력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적으로도 특별한 악행이 대단한 이상주의나 광기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실직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는 정말 평범한 사람의 고루한 이유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설명하기 시작하는 부분이다. 물론 최초의 광기는 ‘히틀러’에게서 기인했을 수도 있다. 그는 광인으로 분류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의 광기가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운영하는 시스템을 통해 진행이 되고 성사가 된다. 현대처럼 극도로 시스템화된 인간 조직에서 악행이 어떻게 실행되는가, 그 과정을 이 책을 통해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이 책의 대단한 점이다. 히틀러가 처음부터 유대인을 그렇게 말살하려고 했는지, 시스템의 운동에 따라 이상하게 누구도 원한 것은 아닌데 그렇게 된 것인지. 사실 그것을 알 수가 없다. ‘총통이 신체적 말살을 명령하셨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고 책에 서술되어 있긴 하다. 그러나 여기서의 ‘총통’이라는 것이 히틀러 한 명인지, 조직의 상부 시스템인지, 이 문장 자체가 나에게는 모호하게 다가왔다.


언어규칙이 고안된 또 다른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그 규칙은 이 문제 처리에 본질적이었던 아주 다양한 많은 협조체제를 이루어 갈 때 질서와 제정신을 유지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되었음이 입증되었다. 150쪽

그래서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을 하고 있는가'라고 말하는 대신, '나의 의무를 이행하는 가운데 내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목격해야만 하는가, 내 어깨에 놓인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가'라고 살인자들은 말할 수 있게 되었다. 174쪽


제정신을 가진 정상적인 독일인들이 인종학살이라는 행동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학살을 '의학적 행동', '마지막 단계'라고 부르는 등, 있는 그대로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유포미즘을 극단적으로 이용해서 말을 하고 문서를 작성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다. 말이란 수단이 얼마나 교묘한지, 거짓말도 지속적으로 듣게 되면 믿게 된다. 일반 독일인들도 전쟁의 참상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서 총통이 우리를 위해 가스를 사용해 줄지도 모른다고 감사하게 여겼다고 한다. 지금 나는 그 시대의 정신세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혹시 지금도 어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쟁 등의 불안한 상황에 처했을 때, 도처가 거짓말이면 1인의 개인은 판단할 수가 없을 것도 같다.


유대인 장로회는 아이히만과 그의 부하들을 통해 각 열차를 채우는 데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필요한지에 대해 들은 다음 수송될 사람의 명단을 만들어 주었다. 183쪽

학살 센터에서 실질적인 살인 작업이 유대인 부대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잘 알려진 사실은 검찰의 증인들의 의해 공정하고도 분명하게 확립되었다. 그들이 어떻게 가스실과 화장터에서 일을 했는지, 그들이 어떻게 금니를 뽑고 시신의 머리카락을 잘랐는지, 그들은 어떻게 무덤을 파고 또 대량학살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그 무덤을 덮어 없앴는지, 유대인 기술자들이 어떻게 테레지아슈타트에서 가스실을 만들었는지가 분명히 드러났다. 194쪽


이 부분을 읽다가 나는 벌떡 일어났다. 유대인이 유대인의 명단을 넘겼구나. 이것은 또 무슨 의미인가? 그리고 많은 유대인이 유대인의 학살에 복역을 했다. 이 사람들은 가스실이 유대인이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가스실이 아니면 더 고통을 당하면서 죽게 될 것이라고. 희망이라는 것은 그들의 머릿속에 없었다. 어차피 죽을 것이니 편하게 죽는 것이라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런데 책 뒷부분에는 유일하게 국가적으로 나치스의 인종학살 정책에 반대한 덴마크의 예시가 나온다. 저자는 그 부분에서, 반대하면 그 반대가 먹히고, 더 소수의 유대인이 죽었다고, 반대는 의미가 있음을 언급한다. 죽음이 횡행하는 전쟁 중에 반대를 한다는 것은 어렵지만 말이다. 그 당시 유대인은 지도체계에, 조직에 실패했다. 조직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는 점. 그 점이 반항을 할 수 없게 된 가장 큰 문제였다.


나치스는 반유대주의가 모든 유럽을 통일하는 공통분모가 될 것이라고 진정으로 확신했다. 232쪽


또한 유대인이라는 민족에 대해서 유럽 전체가 왜 뿌리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히틀러는 아리아인 우월주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유대 민족 말살을 이용한 것인데, 일단 많은 유럽인들이 그것에 동조하게 된 배경을 잘 모르겠다. 이 책은 히틀러 집권 이후를 다루고 있어서 그전에 팽배했던 유대인에 대한 반감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유대인은 성경 시절부터, 즉 유대인이 예수를 죽였다는 믿음에서 기인하여, 역사 대대로 미움을 받아왔다고 한다. 유대인은 자신들이 이익을 독점하고 좋은 것은 자신들이 먼저 차지한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그토록 대대로 증오의 대상이 되어왔으니, 그동안 왜 자신들을 광범위한 미움으로부터 보호하지 못했는지, 미움의 역사가 긴 건지, 인류의 역사가 짧은 건지 아시아인인 나로서는 그 뿌리 깊은 증오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는 그 문제에 관한 한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어요. 저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도 죽이지 않았어요. 저는 유대인을 죽이라는 명령도, 유대인이 아닌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도 내린 적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죽이지 않은 대량 학살자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검찰은 개별 살인 행위를 입증하려고 지속적으로 애를 썼다. 303쪽

그와 반대로, 일반적으로 살상도구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 342쪽

그는 결코 유대인 혐오자가 아니었고, 그는 결코 인류의 살인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의 죄는 그의 복종에서 나왔고, 복종은 덕목으로 찬양된다. 343쪽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거대 체제의 악행. 인류가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시스템 사회를 우리는 살고 있다. 예를 들어, 원자의 폭발력을 극대화했는데, 그것이 수만의 사람을 죽음과 고통으로 몰아넣은 것.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떻게 쓰이는지 알 수 없는 거대 체제.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이다. 아이히만이 유대인을 죽이지 않았으나, 실제 두 손으로 가스실의 문을 닫아서 종족 살인을 시행한 수용소의 유대인 잡부보다 더 큰 죄가 있다는 것, 그런데 자신은 죄가 없다고 끝까지 믿으며, 자신을 업무에 복종하기만 한 ‘희생양’으로 생각한다는 점이 역겨웠다.


저는 독일의 청년들로부터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제가 뭔가를 하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이 젊은이들은 무엇보다도 지난 전쟁에서 있었던 사건들에 대해, 그리고 자기의 아버지들이 한 일들에 대해 결백하기 때문이죠. 337쪽


물론 이러한 희망은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자신의 죽음으로 독일 젊은이들의 죄책감을 없애주고 싶었다는 그의 희망이 그의 사형으로 이루어져서 몹시 화가 난다. 그런데 그 화는 또, 현재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각 국이 벌이고 있는 전쟁 뉴스를 들으며, 도대체 누가 무엇을 어디서부터 잘못한 것인지 판단할 수 없어서 누그러진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391쪽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392쪽


이 부분이 ‘the banality of evil(악의 진부성)’을 아렌트 자신이 설명하는 부분이다. 악의 진부성. 즉, 악은 사유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서 더 크게 저질러진다는 것이다. 사유하지 않는 사람이 거대하고 악한 체제 안에 들어갔을 때 악의 일부가 된다. 현대에 우리는 모두 거대한 체제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체제가 악한지 악하지 않은지 사유하지 않는 우리 모두가 포함된다. 나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라는 문장이 아프다. 나도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물론 죽을 사람을 실어 나르는 등 눈앞의 악행을 돕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상의 업무가 거대한 우리나라 체제 안에서 어떤 역할이 되고 있는지, 솔직히 나는 전체적인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 그 믿음에 근거하여하는 행동들이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전체 속에서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보지 않고 산다. 나는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하고, 업무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데, 그 목적은 너무나 근시안적인 것이어서, 과연 달성하는 것이 좋은 목표인지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운송 담당자로서, 철도 회사들을 연결하고 경찰과 협조하고, 운송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근시안적으로 일을 한다는 측면에서, 매일 주어진 임무만 성실히 달성한다는 의미에서 회사에서 일하는 우리는 본질적으로 그런 아이히만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책이나 글을 읽고 사유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체제가 너무 크고 복잡해서, 이 큰 체제를 뛰어넘어 행동의 방향을 잡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독서와 사유가 필요하다.


ps. 이 책은 스토리나 주장으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사료로서의 의미가 더 중요한 책이다. 그 당시 이런 나쁜 일을 한 사람은 누구누구이며, 누가 적극적이고, 누가 무슨 주장을 했으며, 그걸 잘 기록해 놓아야 역사적 사료로써 가치가 있으니, 책 자체를 그러한 방식으로 기술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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