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 타르 감독의 「사탄 탱고(1994)」를 인상적으로 봤다. 이 영화는 약 7시간짜리 영화로, 유튜브 무료 보기로 며칠 동안 여러 번 나누어서 봤다. 이 숨 막히도록 끔찍한 흑백 영화가 왜 그렇게 흥미로왔고, 지금도 마음속에 계속 남아있을까? 이 영화의 인상적인 점 4가지를 적어보고자 한다.
첫째, 이 영화를 보면서 영화가 시간의 예술이라는 것을 알았다. 첫 장면부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나무와 풀이 무성히 자라고 있는 벌판을 하염없이 보여준다. 벌판 장면이 끝나면 '하염없이'라는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된다. '롱테이크'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오래도록 보여주겠다는 감독의 의도성을 생각한다기보다는, 아주 긴 시간동안 바라보다보니 벌판 그 자체가 내가 사는 곳처럼 그대로 내 마음에 박힌다. 그것이 '하염없이'이다. 가끔 소 목에 달린 종소리와 성당 종소리 같은 것이 들리기도 한다. 종소리를 들으며 하염없이 벌판을 바라보는 게 나는 참 좋았다. 화면 안에 아무 사건도, 등장인물도 소개되지 않아서 더 좋았다. 나중에 시간을 검색해 보니, 약 10여분이 지난 후에 첫 대사가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삶에서는 긴 시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풍경을 보는 일은 꽤 자주 있다. 멍하니 산이나 바다를 보고 앉아있기도 하고 카페에서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도 사실 눈에는 창밖의 풍경이 자연스럽게 담긴다. 이렇게 이 영화가 삶에서 실제로 내가 경험하는 시간을 그대로 경험하도록 해주었다.
영화의 중반쯤에 집단 농장의 농부들이 벌판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장면도 하염없다. 실제 배우가 거대한 벌판을 가로질러 하루 종일 걸어가듯이 그들의 발걸음을 하루 종일에 가깝도록 찍어서 보여준다. 걸어가는 행동 외에는 어떤 스토리도 진행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언제 걸어가는 장면이 끝나나 기다리다가, 나중에는 걸어가는 행동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내가 걸어갈 때 내 발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나도 길을 걸을 때, 내 발을, 내 앞의 길을 그저 무의식적으로 바라보며 걷는다. 삶에서 일상적으로 하는 경험을 화면을 통해 해서 그런지, 그냥 내 존재가 그 화면 안에 녹아들어 가는 것 같았다. 걷는 장면이 끝나고 인물들의 대화가 시작되는 것이 오히려 낯설 정도였다. 나 혼자 길을 걸어가다가 갑자기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기분이랄까. 내가 살아내는 시간을 스크린 위에서 그대로 경험하는 기분을 이 영화는 느끼게 해 주었다. 영화는 어쩌면 우리가 사는 시간을 날 것 그대로 담을 수 있는 유일한 예술 장르인지도 모르겠다.
둘째, 집단 농장 사람들의 어리석음이 그려지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모습 같기도 하다. 영화는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되어 가던 1980년 경 헝가리의 한 집단 농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고 있다.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될 무렵 집단 농장이 처했던 사회, 역사적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이들의 어리석음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먼저 말해야겠다. 사람들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만취인 상태로 그저 제자리를 빙빙 돌기만 하는 탱고를 밤새도록 추고 새벽녘에 지쳐서 여기저기 널브러져 자는 일상이 계속된다. 사탄 탱고이다. 그들은 왜 저 농장을 탈출하지 않는가? 저 농장에는 정말 저리도 희망이 없단 말인가? 일상을 답습하는 우리의 모습도 저러한가?
농장 사람들이 강력한 지도자라고 믿고 따르는 페트리너와 이리미아시에게 돈을 갈취당하는 장면도 농장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끔찍하게 느끼게 한다. 농장 사람들은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자고 말하며 돈을 걷어간 페트리너를 의심하지만, 타고난 사기꾼인 패트리너가 자신을 의심한다면 돈을 돌려받으라고 당당하게 돌려주자, 의심해서 미안하다고 하며 돌려받은 돈을 다시 사기꾼에게 돌려줘 버린다. 농부들은 자신이 가지는 의심에 대한 확신조차 하지 못한다. 그토록 자신감이 없고 남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농장에 갇혀서 살다시피 하던 사람들 이어서인가? 그런데 나에게도 그런 어리석음이 있는 것 같아서 그 장면이 인상 깊었다.
셋째, 이 영화는 아이는 정의롭고 어른은 정의롭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는 고양이를 가지고 놀면서 고양이보다 자신이 더 힘이 있음을 자각한다. 즉, 고양이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음'을 느끼고, 그 권력을 확인하기 위해서 고양이에게 쥐약을 먹여 죽인다. 그러나 죽은 고양이를 보고는 자신이 행사한 '힘'이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자신도 똑같이 쥐약을 먹고 죽는다. 어이없는 비극이지만 단순하고 합당하다.
그러나 어른들은 기회만 있으면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 없이 타인을 이용하고 약탈하려고 한다. 아이의 죽음마저 패트리너에게 이용당한다. 집단 농장의 농부 중 한 사람은 집단 농장 사람들이 곡식을 판 돈을 혼자서 가로채 달아나려고 한다. 이웃들이 자신을 믿어서 돈을 맡긴 기회를 이용하려는 것이다. 페트리너와 이리미아시는 농장 사람들을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자는 감언이설로 속여서 농부들의 돈을 갈취하고 어느 도시의 하급 노동자로 팔아넘긴다. 이리미아시가 농부들을 대할 때는 새 시대를 그들의 손으로 열어갈 수 있다고 부르짖으면서, 동시에 관료들에게 보낸 보고서에서는 그들을 개, 돼지보다도 못한 천박한 존재들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의 이중성과 농부들의 어리석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꼭 어른과 아이의 대비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리석게 죽음을 맞이한 아이가 덜 어리석어 보일 만큼 어른들의 추한 모습을 이 영화는 아무런 감정의 개입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 보여준다. 이러한 사건들은 그 시대의 특정 상황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 시대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넷째, 마지막 장면에 반했다. 이 영화에는 늙고 몸집이 큰 의사가 나온다. 그 마을에서 유일하게 글이란 걸 쓰는 마을의 관찰자이다. 의사는 낡은 집에 혼자 사는데 그 집은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더럽고 좁은 돼지우리 같다. 의사 역시 알코올 중독인데, 집에 술이 떨어져서 술을 구하러 집 밖에 나갔다가 넘어져서 다치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실려간다. 그러나 몇 주간 병원에서 치료받고 집으로 돌아온 그가 하는 일은, 다시는 자신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현관문에 판자 조각을 대고 못을 박아서 막는 일이다.
암흑 같은 집안과 대비되어 현관문으로부터 바깥의 환한 햇빛이 하얗게 쏟아져 들어온다. 그 문을 늙은 의사는 판자 조각을 하나씩 대어 못을 박아 막아간다. 판자가 하나씩 더 붙어갈 때마다 밝게 빛이 들어오는 면적은 줄어들고, 마지막 조각을 못 박을 때 드디어 집안은 완전한 암흑이 되고 영화는 끝난다. 흑백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인상적인 장면이다. 혹자는 이 장면을 자기 관의 못을 스스로 박는 장면이라고 묘사했다. 하염없는 순간들, 아이의 죽음, 어리석은 농부들의 삶, 사기꾼에 의해 팔려 감, 이런 일들이 사탄 탱고처럼 돌고 돈다. 그 후에 마지막으로 인간에게 다가오는 것은 암흑, 즉 죽음 이외엔 없다.
나는 왜 이 영화가 그토록 매력적이었을까? 어리석은 농부들의 모습이 나를 돌아보게 만들어서일까. 물리적으로 7시간이나 이 영화와 함께해서 이 영화가 나에게 '스며들어' 버려서 좋아하게 된 것일까. 하도 오래 들여다보고 있다 보니, 그리고 같은 장면이 '하염없이' 반복되니 그 장면들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7시간짜리 영화를 만든 감독의 고집이 주는 힘을 느껴서인가? 감독은 영화를 2시간짜리 오락거리로 만들지 않고, 7시간짜리 인생 그 자체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무려 7시간짜리 흑백 영화를 가끔 '다시' 보고 싶기도 하니 그 매력에 대해서는 말 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