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존재하지 않지만 악은 존재한다.
이 글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와 벨라 타르 감독의 [사탄 탱고]를 비교하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두 영화는 매우 비슷하다. 대사 하나 없이 자연을 끊임없이 응시하는 카메라와, 함께 모여서 어리석은 일을 하는 어른들, 그 사이에 희생양이 되는 어린 여자 아이. 스토리의 구조가 똑같다.
그러나 차이점은 등장하는 인물들이 악한지 악하지 않은지에 있다. [사탄 탱고]의 주요 인물들은 악한 마음을 가지고 행동한다. 마을 농민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을 맡아주고 있는 한 농부는 그 돈을 가지고 도망가려고 생각한다. 생각만 하고 실행은 못하게 되지만. 농민들로부터 지도자로 추앙받는 페트리너와 이리미아시는 농민들을 더 좋은 약속의 땅으로 데려간다고 속여서 그들이 모아놓은 돈을 갈취하고는 그들을 어느 도시의 노예로 팔아버리다시피 한다. 어른들이 술에 취해 밤새도록 탱고를 추면서 노는 동안 들판에서 혼자서 놀던 어린 여자아이는 고양이에 대한 자기의 권력을 증명하기 위해 고양이에게 쥐약을 먹여 죽인다. 악한 의도를 가지고 한 자기의 행동의 결과에 놀랐는지 자신도 쥐약을 먹고 죽는다.
그런데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는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글램핑장을 지으려는 사람들마저 회사 부채 때문에 걱정하는 사장, 마을 사람들의 주장에 동화되어 회사를 그만둘까 고민하는 직원들 정도이다. 컨설턴트는 악하다기보다는 시대에 부합하는 인물이다. 밸런스를 중시하는 타쿠미도 악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고, 영화 마지막에 희생(?)되는 여자아이는 악하기는커녕 사슴을 동경한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악한 의도가 없어도 악한 일은 벌어진다. 코로나 보조금은 선한 의도로 정부가 책정했겠지만, 그것을 타는 기업들은 악한 일을 하는 결과를 낳는다. 마을에는 사슴의 서식처를 파괴하고, 물을 오염시키고 산불이 날 위험을 높이는 글램핑장이 들어서게 된다. 정화조의 위치 재설계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는 마을의 물이 오염된다. 즉, 악은 이윤 창출을 위한 시스템에서 온다. 사장도 컨설턴트도 마을에 직접 오지 않는다. 그들은 시스템의 꼭대기에서 사태를 파악하고 의사를 결정한다. ‘시스템’ 안에서 악은 무지, 무관심, 무책임을 거쳐서 생산된다. 사장은 글램핑장 건설 과정 자체에 무지해서 컨설턴트에게 의존한다. 컨설턴트는 마을 사람들을 만난 적도 없으므로 사람들의 우려에 무관심하다. 그는 회사의 비용 절감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이윤, 즉 자신의 유능함을 증명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글램핑장 건설의 책임은 사장에게 있으므로 그는 무책임 뒤에 숨을 수 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시스템 속 개인의 무지, 무관심, 무책임이 어떻게 악을 생산해 내는지 극단적인 예를 볼 수 있다.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을 각지의 수용소로 수송하는 업무의 총책임자였다. 그는 유대인을 효율적으로 차질 없이 수송하는 자신의 책임에 충실했다. 그리고 수송된 유대인은 가스실 등에서 처형되었다. 그는 자기 손으로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은 대량학살자로 전후 예루살렘에서 교수형 되었다. 물론 이는 매우 극단적인 예이지만, 현대 사회처럼 복잡하고 거대한 조직 안에서는 나의 성실함이 어떤 악한 결과를 양산하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인간의 마음에 악은 존재하지 않지만 시스템이 생산해 낸 악은 존재한다. 이것이 이 영화가 소심한 방법으로 전달하는 바가 아닐까. 지하철 안에서 손잡이를 잡고 있지 않으면, 지하철이 급정거를 할 때 옆 사람을 밀게 된다. 내 마음을 다잡고 합당한 사고 방향의 끈을 평상시에 잡고 있지 않으면, 사회가 움직일 때 나도 모르게 악에 가담하게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