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스로 되돌아가다(2021), 디디에 에리봉

by 봄눈

시작부터 아픈 마음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이유는, 이 책을 쓰기 전까지 작가가 얼마나 자기 자신의 고향을, 과거를, 가족을 모두 부인하며 고통스러운 삶은 살아왔겠는가를 생각하며 읽었기 때문이다. (내가 작가를 알아서가 아니라, 옛날에 살았던 동성애자는 모든 것은 부인당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얼마나 매일의 자신을 미워하고 무시했으면, 자신의 고향, 과거, 가족을 모두 부인할 수밖에 없었겠는가?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모두 부인했기에 얼마나 헤매었겠는가? 자기 자신을 재발명하지 않고는 버텨낼 수 없었던 것은 그 혼란 때문이었을 것이다. 힘들었을 저자의 과거를 생각했기 때문에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음이 아팠다.

<랭스로 되돌아가다> 책표지


그런 저자에게 삶을 돌아 볼 기회가 생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수십년간 방문하지 않던 고향의 어머니에게로 돌아갈 일이 생기는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회상과 그분들의 삶의 이야기로 책을 시작한다. 연대기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어머니가 삶의 과정에서 받은 상처, 혹은 기쁨을 돌아본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나도, 우리 어머니는 살면서 어떤 부분에서 상처를 받아오셨을까? 그것을 우리 어머니에게 물어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저자의 아버지가 가정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분이셨기에, 그런 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어머니는 다음과 같은 삶을 사실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에 대해 어머니에게 남은 감정은 환멸과 증오가 뒤섞인 적대감뿐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동안은 언제나 그랬다. 환멸과 증오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헌신은 일종의 의무였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미지였다. "어쨌든 네 아버지를 저렇게 내버려 둘 순 없어." p.17


이 부분은 저자의 어머니에 대한 서술이지만, 왠지 많은 어머니들이 이와 비슷했을 것 같다. 저자는 적대감밖에 남은 것이 없는 아버지에 대한 헌신이 어머니의 ‘의무’였다고 기술한다. 나아가서 어머니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미지!’였다는 것까지 저자는 어떻게 파악했을까? 어머니가 그 말씀을 하지는 않으셨을 텐데. 가족보다 더 큰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가족도 지키는 자신의 이미지를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어머니는 아셨다. 혹은 어머니 스스로 자기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으로서의 자신의 이미지를 지켜야 했을 것이다. 그래야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것은 내가 살아오는 동안 내내 정상성과 비정상성이 상대적, 관계적, 유동적, 맥락적이고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들은 항상 부분적인 현실일 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적 정당성의 부재가 그것을 불안감이나 고통 속에서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심리적 타격을 가할 수 있으며, 정당성과 '정상성'의 공간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심층적인 열망을 얼마나 강렬하게 자극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도의 힘은 대부분 바로 이 바람직함에서 비롯된다.) p.79


'정상성'의 범주가 저자를 평생에 걸쳐 괴롭혔음은 말할 것도 없다. 자신의 고통스런 경험을 바탕으로 외할머니의 열망을 짐작해 보는 부분이다. 어쩌면 저자의 어머니도 '정상성'의 범위 안에 있기 위해서 환멸과 증오뿐인 아버지에게 '의무'를 다하셨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저자는 정상성의 기준에서 벗어난 위치에 있는 가족(외할머니)의 개인적인 행적을 돌아보고 이해함으로써 자신을 이해하고 껴안으려는 노력을 계속해나간다.


마찬가지로 나는 그녀가 자신이 선택한 결과를 감수하며 느꼈을 심정을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p.85


저자가 자신의 외할머니가 독일과의 전쟁 중에 한 일에 대해서 사회적인 비난을 받았을 장면을 떠올리며, 그런 비난을 받을 때의 외할머니의 심정을 자신은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외할머니가 모두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저자가 할머니를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상대의 심정을 헤아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대에 대한 존중의 시작인 것 같다.


내가 암송을 채 마치기도 전에 어머니는 화를 냈다. 아니 차라리 분노를 터뜨렸다고 하는 게 좋으리라. 내가 어머니를 놀리려고 든다고 믿었던 것일까? 어머니를 깎아내리려 한다고? 중등 교육 몇 달이 내게 벌써 심어주었을 우월감을 그녀에게 드러내려 한다고? 어머니는 미친 여자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p.92

공부를 계속하지 못했다는 어머니의 좌절감은 모두 이런 식의 분노의 폭발로 표현되었다. p.93


어머니가 폭발을 했다는 것은 어머니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분노를 위로하고 나눌 수 있으면 좋겠지만, 폭발하는 사람은 자신의 분노를 수치심 때문에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말로 할 정도가 된 것은 이미 폭발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폭발하는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지? 폭발하는 사람은 세상에 많은데, 폭발하는 사람과 어떻게 함께 살아가지?

동명의 영화 속 디디에 에리봉의 가족


공부를 하지 못한 어머니의 분노도 크지만, 이런 가족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서 '학문'의 길을 가게 된 에리봉이 느끼는 단절감도 크다.


나는 내가 접어든 길에서 앞으로 나아가며 부딪힐 난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기대할 수도 없었다. p.105


디디에 에리봉이 가족들과 전혀 다른 길을 가기 시작하면서 느꼈던 막막함을 표현한 부분이다. 정보를 주고받을 사람이 없다는 것도 힘들었겠지만, 누가 자신을 도와주었어도 자신은 저 사람과 같지 않다고 느끼는 정서적 고립감이 더 컸을 것이다. 아래 부분은 그 당시 느꼈을 내용이 아니라 사회학자가 된 후에 과거를 돌아보며 분석한 것일 것이다.


민중 계급의 아이들, 그리고 그보다는 정도가 덜하지만, 중간 계급의 아이들을 학업 과정 내내 학교에서 제거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교육 체계의 진짜 기능은 무엇일까? p.138

결국 나 이전의 수많은 아이들이 그랬듯, 나 역시 이 체제에서 소리소문 없이 추방당하면서 마무리될 터였다. 어쩔 수 없는 구조적 힘 때문이지만, 마치 내 개인적 행동의 단순한 결과라는 모양새를 띄고서 말이다. p.190


에리봉의 책에서 교육에 대한 서술이 가장 급진적으로 느껴졌다. 학교의 역할은 스스로 자기가 원래 속해 있던 계급으로 돌아가도록 만드는 것이고, 그것을 계급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나의 탓으로 돌리게끔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 우와. 우리가 생각하는 학교의 역할, 즉 계급 사이의 사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과 정반대의 관찰인데, 이 관찰이 지금도 대체적으로 맞아 보인다.


(상류층 친구와 관련해서) 나는 그의 경쟁 상대가 되지 않았다. 계속해서 열등한 나 자신을 마주해야 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잔인했고 내게 상처를 주었다. p.195

교육의 위계서열 구조에 무지하고, 선발 메커니즘에 숙달되어 있지 못한 학생은 가장 역효과를 내는 선택, 가장 나쁜 결과가 예정된 경로를 고르도록 이끌린다. 미리 알고 있는 누군가는 조심스럽게 피해 가는 것에 다가가는 스스로에게 감탄하면서 말이다. p.204


이 부분은 참 어려웠다. 친구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상처를 주고받아야 한다니, 많은 것을 투자하고도 결국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경로로 이끌리게 만들어진다니. 알아차리기 어려운 이 메커니즘을 어떤 구체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저자는 인지하고 서술할 수 있게 되었을까? 잘못된 길을 가면서 스스로 감탄한다는 마지막 서술이 가장 뼈아프다. 잘못된 경로로 간 저자는 이제까지의 자신을 모두 지워버리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생존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발명'해내기에 이른다.


지배 메커니즘과 자기 발명의 과정 p.254

가래침을 장미로, 언어적 공격을 화환과 빗줄기로 탈바꿈시키는 순간이 온다고. 수치심이 자긍심으로 변화하는 순간 말이다. 이 자긍심은 철저히 정치적인데 정상성과 규범성의 메커니즘에 그 근본으로부터 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스스로 다시 표명하는 일은 무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기 정체성을 주조하기 위한 느리고 인내가 필요한 작업을 사회질서가 우리에게 부과했던 바로 그 정체성으로부터 수행해 간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모욕과 수치심에서 결코 해방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종종 잊고 있었던 경고를 매 순간 날리며 우리가 잊고 싶어 하는 감정을 일깨운다. p.256


위의 서술은 매우 정확하다. 자기 자신을 발명까지 하지만, 과거의 상처는 역시 또 지울 수가 없다.

이 부분은 영화 <박화영>을 생각나게 했다. 박화영은 엄마에게서 버림받은 결핍으로 인해서 스스로는 진짜 좋은 엄마가 되고자 하지만, 그건 결국 엄마에게서 받은 상처를 잊을 수 없어서이다. 그리고 박화영은 그 상처를 마주하고 인정할 수 없다. 마주하고 인정할 수 없으면 치유도 되지 않는다. 박화영은 치유될 수 있을까? 자신을 이용하지 않고 진짜 엄마처럼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제야 자기 상처를 돌아볼 용기를 얻게 될까? 박화영은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이런 동화적인 바람밖에 가질 수 없나. 아니다. 박화영은 그 상처를 기화시켜 버린다. 승화가 아니고 기화이다. 그냥 웃으면서 공중에 흩어버린다. 박화영은 자신이 시작한 그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데, 디디에 에리봉처럼 상처의 자리로 돌아가서 계속 스스로를 상처 주지는 않는데, 삶이 망가진다. 박화영의 삶은 망가진 것인가? 아닌가? 박화영은 웃지만 그녀의 삶이 망가졌다고 생각한다. “너네는 나 없었으면 어쩔 뻔 봤냐?”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계속 확인하려고 하지만,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철저히 밟히고 이용만 당한다. 이용만 당하지만 본인은 또 거기서 안도를 느낀다. 이용을 당해서라도 가족 안에 남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본인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정말 그럴까? 박화영과 같은 사람은 사실 주변에 많이 있고, 그런 인물을 포착하고 그려냈다는 것에서 박화영이라는 영화의 가치는 있다. 그런데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입장에서 보면, 박화영 감독처럼 상처 입고 일그러지고 짓눌린 피해자를 마치 도인인 것처럼 애매하게 그려내는 것보다 상처를 직면하고 파헤치는 디디에 에리봉이 나은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한 것을 가지고서 우리가 스스로 하는 것이다. p.258


고향과 과거를 저버리고 도시에서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얻게된 저자는 위와 같은 심심한 자기 위로를 한다. 아마 많은 것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이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삶의 고통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사람들이 자신에게 행한 것을 증오하고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적 삶도 가까이서 보면 그다지 아름답지만은 않다. 현실은 우리가 거기 끼어들기를 열망할 때 지니는 이상화된 비전에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다. p.266


역시 이 부분도 자신이 바라던 사회적 지위를 이룬 여유에서 오는 문장이다. 저자는 고통스러운 길을 걸었지만 그 길에서 성공했고, 그래서 이런 책도 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 성공으로 이끈 그 열망 때문에 그렇기 길고 험한 길을 저자는 걸어왔다. 그런 열망이 있었기에 저자의 삶이 가끔 일어나는 작은 환희들로 가득 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비전을 가졌던 삶은 그렇지 않은 삶보다 더 찬란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 비전이 실체가 없는 것이었을지라도.

l_2021013001003275200290882.jpg 디디에 에리봉

사람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증오의 감정에 그토록 집요하게 매달리는 이유는 증오가 사라지고 나면 고통에 직면할 것임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p.33


어떤 사람을, 어떤 대상을 끊임없이 증오할 때, 어떨 때는 왜 그렇게 증오하는지 자신도 모를 때가 있다. 오늘의 증오가 내일의 증오로 이어지고, 계속 미운데 왜 미워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증오가 지나가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왜 증오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한 증오 뒤에는 '고통'이 있는 것임을 인지해야 한다. 사실은 어떤 점이 고통스러운데 그걸 인정할 수 없으니, 그 고통을 어떤 상대에게 투영하여 그 상대를 증오하는 것이다.

저자는 아버지를 그토록 증오했는데, 그것은 자신이 게이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가족들과 함께할 수 없다는 고통을 감추기 위한 증오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저자는 자신이 가진 증오의 이유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증오하고, 증오하기 때문에 멀리하고,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저자는 '왜 아버지와 많은 얘기를 나누어 아버지를 알아가지 못했을까?'하고 통탄을 한다.

증오보다는 고통이 낫다. 증오는 상대 파괴만을 바라므로 자신이 달라질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지만, 고통으로부터는 어쩌면 자신이 변화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저자는 자신이 느꼈던 고통을 솔직히 드러내고, 자신의 살을 한 칸 한 칸 저미는 것과 같이 이렇게나 쓰기에 고통스러운 책을 써냈으니, 그 고통을 받은 뒤 비로소 자유롭고 충만해졌기를 바란다.


ps. 자기 서사는 왜 그렇게 어려운가? 내 안의 수치심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얘기하기 부끄러운 부분에 다다르면 감추고 쓰고 싶지 않아진다. 그런데 에리봉처럼 그 수치심을 끝까지 밀어붙여야 한다. 그래야 수치심의 원인을 알고 비로소 그 수치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에리봉과 같은 분석을 하려면 일생을 바친 공부가 필요하고, 공부에서 얻어지는 거리감도 필요하다. '더뷰티풀'이라는 채널에 나온 신동우 시인은 '부끄러운 것을 쓰는 것이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며, 이와 같은 논의는 '수치심 권하는 사회'라는 책에서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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