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르담 대성당
건축법에서 재축(再築)이란 “건축물이 천재지변이나 그 밖의 재해(災害)로 멸실된 경우 그 대지에 다시 축조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신축, 재개발, 재건축 등 새로 짓는 것이 건축의 주류인 상황에서 재축된 건축물들을 소개하고 건축의 의미를 돌아보고자 이 연재를 준비했습니다.
파리 그리고 노트르담
유럽을 대표하는 도시를 꼽자면 여러 도시가 떠오를 것이다. 쉽게 고르기 어렵다. 그렇다면, 낭만, 예술, 연인 같은 단어를 연상하면 어떤가? 이제 이 도시만 남아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프랑스의 파리(Paris)다. 역사와 문화의 층이 두터운 파리에는 다양한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들도 많다. 지금 우리 시대를 포함해서 모든 시대의 중요한 건축물들이 밀집된 건축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이런 파리에서 유독 사랑받는 건축물이 있다. 파리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즉, 노트르담 대성당이다.
모든 도시의 도로는 도로원표(point zero)를 기준으로 출발하는데, 파리의 도로원표는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 있다. 그야말로 파리의 중심인 셈이다. 태양왕 루이 14세와 루이 15세 시기에는 프랑스의 국력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복원되기도 하고, 프랑스혁명 때에는 성모 마리아상이 자유의 여신상으로 교체되면서 자유와 시민의 상징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황제 대관식을 이곳에서 진행했고,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폭격에 스테인드글라스가 파손될까 싶어 조심스럽게 떼어냈다가 전쟁 후에 복원했다. 프랑스와 파리 역사의 모든 장면에서 중요한 장소였으니 이 성당이 갖는 의미와 가치는 너무나도 크겠다. 파리지엥이 아니더라도, 프랑스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성당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2019년 4월 15일. 노트르담 성당에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첨탑은 화염 휩싸였다. 이 장면은 보고 있어도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고, 세계의 많은 사람들을 슬픔에 빠트렸다. 첨탑이 무너지는 순간에는 나도 숨도 멎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우리의(Notre)-귀부인(Dame)”은 쓰러지고 만다. 하지만, 슬픔도 잠시 노트르담 대성당의 복구는 당연한 순리였고, 새로운 노트르담이냐? 아니면 복원된 노트르담이냐? 의 이야기가 오고 갔다.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의 경험에서 당연히 옛 모습 그대로의 노트르담 복원을 생각했던 나에게 “새로운 노트르담”을 제안하는 모습이 처음에는 낯설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궁금했다. 어떻게 “새로운 노트르담”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고, 프랑스와 파리를 상징하는 문화재인데, 원형복원이 아닌 다른 방안을 제안한다고? 그래서 노트르담의 시작과 지금까지의 역사를 찾아보게 되었다.
왕들의 본당
1160년 파리의 성당이 ‘유럽 왕들의 본당’이 되자 ‘모리스 드 쉴리’ 파리 교구장은 노트르담 대성당 자리에 있던 기존 성당을 지금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짓도록 했다. 격식에 맞는 규모와 위엄을 갖는 대성당으로 재건축을 단행한 것이다. 1163년 국왕 루이 7세가 초석을 올리면서 공사가 시작된다. 공사가 진행될수록 얇은 벽이 점점 높아지면서 균열이 생기고 벽이 밖으로 밀리자 바깥벽 주변에 지지벽이 만들어졌다. 이 지지벽이 최초의 플라잉 버틀러스다. 1225년 서쪽 정면이 완성되고, 1250년 서쪽 두 개의 탐과 아름답고 화려한 스테인드 그라스 장미창이 완성되었다. 180여 년에 걸친 대공사를 마치고, 1345년에 이르러 노트르담 대성당은 축성식 할 수 있었다. 최초의 고딕 성당으로 시작해서 고딕 시기 내내 지어진 노트르담 대성당은 르네상스 시대의 시작이라고 여겨지는 14세기 중반에 완성되었다. 그야말로 고딕 건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화려한 고딕 건축의 최고봉인 대성당에도 시련이 있었다. 1548년, 프랑스 칼뱅주의 개신교도인 위그노에게 노트르담 대성당의 성상들은 우상이었다. 우상숭배를 신성모독으로 여긴 위그노들은 대성당에 분노하고 성상과 성당의 외부를 파괴했다. 파괴된 대성당은 100년이 지나 태양왕 루이 14세에 이르러 개축될 수 있었고, 이 공사는 루이 15세 시기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강력한 왕권 아래에서 고딕 성당의 상징과도 같은 화려한 스테인드 그라스 창이 제거되었고, 성당 아래 무덤들도 없어졌다. 그나마 북쪽과 남쪽의 장미창은 겨우 남았다. 개축이라고는 하지만, 본래 성당의 모습과 차이가 큰 신고전주의 풍의 모습이었다.
위기의 노트르담
꺼지지 않을 것 같던 프랑스 왕의 태양 같은 힘도 1793년 프랑스혁명으로 끝이 난다. 혁명의 시기에 대성당의 많은 많은 보물은 강탈당하고, 구약성서의 유다 왕들의 조각은 프랑스 왕으로 오인되어 머리가 잘려나갔다. 제대 위에 있던 성모 마리아상은 자유의 여신상으로 교체된다. 성당은 말먹이나 음식물 창고로 사용되며 화려함과 권위를 내려놓게 된다. 하지만, 노트르담 대성당의 위기는 끝이 아니었다.
19세기 중반 ‘오스망’으로 대표되는 파리의 도시계획가들은 18세기 프랑스혁명 이후 폐허나 다름없었던 노트르담 대성당을 철거하고 직선의 대로를 설치하는 계획을 고려했다. 당시 노트르담 대성당을 애정 한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노트르담 대성당을 배경으로 한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노트르담의 꼽추)’을 발표하며 대성당의 전통을 일깨우고 관심을 고취시켰다. 이러한 노력은 노트르담 대성당 보호와 복원을 위한 기금 마련 운동으로 이어졌다.
펜 끝에서 시작된 복원
빅토르 위고의 펜 끝에서 시작된 대성당 복원의 씨앗이 결실을 맺는다. 장 바티스트 앙투안 라쉬와 외젠 비올레르 뒤크의 계획과 감독 아래 1845년 복원이 시작된다. 이때 우리가 알고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모습이 갖춰진다. 비올레르 뒤크가 디자인한 플레슈(flèche, 첨탑의 일종)가 건립되고, 빗물을 처리하는 기능을 하면서 사자, 용, 박쥐 등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한 키메라(chimères, 이무깃돌)들이 추가되었다.
20세기 초반 두 번의 세계대전은 노트르담 대성당에게 큰 위기였다. 독일의 폭격의 위협 속에서 너무나도 약하고 여린 거대한 스테인드 그라스는 하나하나 분리해서 안전하게 보관했다고 한다. 키메라들도 보호와 관리를 받았고 큰 피해 없이 전쟁의 끝에 서 있을 수 있었다. 분리되었던 스테인드 그라스도 제자리를 찾았다. 비올레르 뒤크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이렇게 위기를 넘겼다.
화재로 잃은 노트르담
고딕 시대를 상징했던 최초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태양왕 루이 14세 시기에 신고전주의 풍의 모습으로 개축되었다가 19세기 비올레르 뒤크의 디자인으로 세 번의 재탄생을 했다. 노트르담 대성당이 세 번이나 큰 변화를 겪으며 부활한 것은 파리의 변화, 넓게는 프랑스의 정치, 종교적 변화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새롭게 태어난 것과 같다. 이런 역사를 이해하고 보니 노트르담 대성당이 파리지엥과 프랑스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불의의 사고로 노트르담 대성당을 잃었지만, 한편으론 새로운 탄생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1,000년에 가까운 노트르담 대성당의 역사 속에서 세 번의 재축은 모두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도전하는 재탄생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숭례문의 복원 과정에서 전승되지 않은 전통을 이론과 추정으로 찾으려는 아이러니한 과정은 많은 논란과 의문을 남겼다. 박제되고 고착된 전통은 우리에게 유의미한 전통일까? 2019년 화재 이후 쓰러진 노트르담 대성당은 결국 복구될 것이다. 이전과 얼마나 똑같이 복원하느냐도 중요할 수 있지만, 어떤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담고 재축될지 흥미롭고 기대된다. 단순 복원이 아닌 재탄생한 노트르담 대성당이 불멸의 건축으로 남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