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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jae Shin Dec 11. 2022

불멸의 건축 11

숭례문 ( 崇禮門 ; Sungnyemun Gate )


건축법에서 재축(再築)이란 “건축물이 천재지변이나 그 밖의 재해(災害)로 멸실된 경우 그 대지에 다시 축조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신축, 재개발, 재건축 등 새로 짓는 것이 건축의 주류인 상황에서 재축된 건축물들을 소개하고 건축의 의미를 돌아보고자 이 연재를 준비했습니다.
어둠 속 숭례문

2008년 2월 10일 저녁 8시 40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숭례문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불꽃이 일어났고, 5시간 뒤 2층 목조 누각이 모두 전소되고 1층도 50% 소실되었다. 600년 역사의 숭례문은 그렇게 5시간 만에 무너졌다. 화재 후 5년의 공사기간 동안 숭례문 앞을 지날 때면 안타까운 맘이 컸다. 그래서 지금처럼 재축되어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숭례문이 더 자랑스럽다. 특히 지어진지 20~30년 정도 지나면, 여러 가지 이유로 재개발, 재건축 이야기가 나오는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더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문득 ‘조선시대에도 숭례문의 재축이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조선시대에도 두 번의 큰 보수공사가 있었는데, 한 번은 전면 해체 후 지반공사까지 보완한 세종 때의 중수重修(1448)이고, 두 번째는 누각이 기울어 새로 고쳐지은 성종 때의 중수重修(1479)였다. 조선 초기 80년 정도의 기간 동안, 신축(1398) 후 두 번의 재축이 있었던 것이다. 조선 건국 시점부터 지금의 대한민국 시기 까지 약 630년 간 숭례문 부활의 역사를 짚어 보자. 


도성의 상징, 남문    
대한제국 시기 숭례문(1904)© 904 Korea Through Australian Eyes(photobook) / George Rose (Australian)

숭례문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경계로서 관리와 방어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도성의 남문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가 1394년(태조 3)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결정하고, 이듬해인 1395년(태조 4)에 종묘와 사직 그리고 새 궁궐을 준공한다. 이 과정은 1년을 넘기지 않았다. 태조는 곧바로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을 두고 정도전에게 성 쌓을 자리를 정하게 했다. 1396년(태조 5) 1월부터 도성을 쌓는 일이 시작된다. 이때 숭례문(남문)을 비롯한 흥인문(동문), 돈의문(서문), 숙청문(북문) 같은 4대문과 홍화문, 광희문, 소덕문, 창의문의 4소문도 착공한다. 숭례문은 1398년(태조 6년)에 준공된다. 착공한 지 2년 만이다.          

 600년 전에는 지금의 세종시와 같은 신도시

14세기 조선의 사람들에게 한양은 지금으로 치면 신도시나 행정수도인 세종시 같은 느낌이었을까? 천도를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하고, 1~2년 만에 세워진 신도시에 정을 붙이지 못한 사람도 많았던 것 같다. 숭례문이 준공되던 해인 1398년 10월에 즉위한 정종은 1399년 3월에 개성으로 환도를 단행한다. 숭례문을 비롯한 한양의 많은 건축물들이 준공되자마자 쓸모를 잃고만 것이다. 1400년, 정안군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다. 세종(이도)의 아버지 태종(이방원)이다. 태조(이성계)는 아들 태종에게 한양으로 재천도 할 것을 요구하고, 태종은 이를 받아들여 1404년(태종 4) 한양으로 재천도 할 것을 명한다. 재천도 과정에서 이궁인 창덕궁을 건설하고, 청계천을 정비한다, 청계천 주변으로 행랑을 건설하여 시전을 조성하면서 경제적인 생활이 가능한 도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한양은 확고하게 조선의 새로운 수도가 될 수 있었다. 현대의 많은 행정수도가 다양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 630년 전 한양도 10여 년 간 천도와 환도 그리고 재천도 과정을 통해 이후 600년을 다졌다.          

세종 때 있었던 숭례문 재축, 그리고 여러번의 고처 지음

숭례문 위치는 본래 남산의 줄기가 내려오는 곳으로 광통교에서 남쪽으로 향하면 나타나는 언덕이었다. 태조 때 이 언덕을 낮추고 지반을 평평하게 한 뒤에 숭례문을 세웠는데, 이때 지반공사에 부족함이 있었는지, 아니면 적절한 지반고가 확보되지 않았었는지 알 수는 없다. 태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세종은 할아버지 때 만들어진 숭례문의 지반 높이가 낮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세종실록은 1433년 세종이 황희, 맹사성, 권진 등을 불러 상의한 뒤 숭례문을 전면 해체하여 땅을 돋은 뒤 다시 세우는 것으로 정했다고 전한다. 당시에도 투자심사나 사업성 검토 등의 절차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14년이 지난 1447년이 되어서야 공사가 시작된다. 이것을 개축이나 재축으로 보아야 할지 크게 고치는 중수로 보아야 할지 불확실 하지만, 2년 동안 진행된 것으로 보아 1398년 처음 지어졌을 때처럼 새로 짓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세종은 1448년 두 번째 숭례문을 세우고 1450년 재위를 마친다.          

그런데 이 세종 대의 두 번째 숭례문도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성종 때인 1478년 숭례문 누각이 크게 기울었다. 재축한 지 30년 만이다. 상부의 누각을 전면적으로 크게 보수하였고, 이때 팔작지붕이었던 것을 지금의 우진각 지붕으로 변경했다는 의견도 있다. 아무튼 크게 고쳤고 역시 2년 만에 중수 공사를 마쳤다. 이후에는 새로 짓거나 크게 고친 기록이 없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숭례문은 성종 대에 크게 고쳐 만든 이 세 번째 숭례문이다. 기록으로 남아있진 않지만, 조선 말기 1868년 경복궁 중건 때에 숭례문도 한 차례 보수한 것으로 추정한다. 숭례문의 일부 부재가 고종대의 것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에 합리적인 추론으로 보인다.     

위기의 숭례문    
성곽이 남아있는 숭례문(1900년경) © 한양대학교 동아시아건축역사 연구실

20세기에 들어서며 숭례문의 시련이 시작된다. 1907년 일본 황태자가 방문하는 것을 계기로 숭례문 옆 성곽이 헐렸다. 1909년에는 주변 성곽이 모두 훼철되고, 양쪽으로 길이 개통되었다. 1910년에 숭례문 둘레에 원형으로 석축이 쌓였고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숭례문은 문의 기능을 잃었고 대로의 가운데 홀로 놓여 출입할 수 없는 건축물이 되어버렸다. 숭례문 지키던 한양도 그 이름을 잃었고, 나라도 잃은 일제강점기에 안타까운 모습으로나마 숭례문은 겨우 살아남았다.          

일제강점기 성곽이 훼철된 숭례문 © 국립중앙박물관
일제강점기 숭례문 일대(1940년대) © 서울역사박물관
한국전쟁  그리고 상처받은 숭례문

광복을 맞은 숭례문은 한 번 더 큰 위기를 맞는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서울은 전쟁의 한 복판이 되었고, 폭격과 시가전 속에서 숭례문은 큰 상처를 입는다. 전쟁 중 파손된 부분은 1953년 7월에 이루어진 휴전협정을 전후해서 임시로 보수가 이루어진다. 시멘트로 깨지거나 떨어져 나간 부분을 매우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전쟁의 위기를 넘긴 숭례문은 1961년부터 1963년까지 1년 10개월, 약 2년간 전면 해체 공사가 이루어진다. 세 번째 재축이다.           

한국전쟁으로 파손된 숭례문 © 문화재청
한국전쟁 중 긴급 보수된 숭례문(1953) 작가미상
복원공사를 마친 숭례문(1963) © 문화재청
기록과 보존의 노력

문화재청은 1960년대부터 문화재 보수과정에서 실측조사사업을 진행해왔었다. 중요한 전환점은 1999년이었다. ‘기록화사업’이라는 별도 사업으로 중요한 문화재부터 보수공사를 하지 않더라도 정밀실측조사를 통한 기록화를 시작한 것이다. 숭례문은 이 ‘기록화사업’의 일환으로 2004년부터 2년간의 정밀실측조사를 통해 2006년 ‘정밀실측조사 보고서’를 발간했다. 부재 하나하나의 세밀한 크기와 형태까지 기록한 보고서다. 처음 만들어진 태조 때와 이후 세종, 성종 그리고 대한민국 시기의 중수까지 신축과 재축 공사의 기간이 모두 2년 정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정밀실측조사 기간이 2년 동안 진행된 것은 우연일까? 정밀실측조사는 그래서 디지털 재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화재가 있었던 것은 불행이지만, 소실되기 2년 전에 정밀실측조사가 마무리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이 조사가 없었다면, 우리는 엉뚱한 모습의 숭례문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 시기 숭례문 일대(1958) © 국가기록원
1960년대 숭례문 주변 작가미상
1980년대 숭례문 주변 © 국가기록원
순간의 상처, 감당하기 힘든 아픔

2008년 방화로 소실되어 진행된 마지막 네 번째 재축(복구) 공사는 2013년까지 5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이전의 재축 공사와 비교하면 2.5배의 기간이다. 그만큼 신중함이 크고 확인의 과정이 필요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제는 방화로 인한 소실의 충격과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문 것 같다. 숭례문은 명실상부 서울 시민과 대한민국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나라가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바뀌고, 한양이 서울로 바뀌었다. 한양도성은 성의 기능을 상실했고, 숭례문도 문의 기능을 잃었지만, 숭례문은 다시 부활했다. 국가와 도시의 흥망을 넘어서 용도와 기능을 뛰어넘는 건축물의 가치가 있다. 숭례문은 또 다른 위기와 어려움이 있더라도 부활을 거듭할 것이다. 그동안 이 연재를 통해 소개한 다른 ‘불멸의 건축’과 함께 숭례문이 서울의 ‘불멸의 건축’으로 영원하길 바란다.

화재가 발생한 숭례문(2008) © wikimedia.org / Kwangmo
진화 후 숭례문(2008) © wikimedia.org / Otebig
복원 공사 중 숭례문(2008)
숭례문 연혁     
1398년 첫 숭례문 완성. 공사기간 2년 (태조)
1433년 숭례문을 완전히 헐고 땅을 돋운 뒤 새로 짓기로 함 (세종실록)
1448년 두 번째 숭례문 완성. 공사기간 2년 (세종)
1478년 숭례문이 기울어짐 
1479년 숭례문 중수. 공사기간 2년 (성종)
1907년 성곽이 헐고 주위에 석축을 쌓음. 일반인 출입이 금지됨 (일제강점기)
1953년 한국전쟁으로 파손이 심해짐
1963년 전면 해체 중수공사 완료. 공사기간 2년 (대한민국)
2006년 숭례문 정밀실측조사 보고서 발행. 조사기간 2년
2006년 일반인 출입이 가능해짐
2008년 숭례문 방화로 소실
2013년 숭례문으로 복구 완료. 공사기간 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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