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저 이제 칼국수 먹을 수 있어요.

by 민들레

비 오는 날이면 항상 할머니는 칼국수를 밀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달력 종이를 넓게 깔고 칼국수를 밀고 있는 할머니가 있었다. 밀가루 반죽이 달력 종이만큼 얇아야 정말로 맛있는 면이 된다며 땀을 뻘뻘 흘리며 홍두깨를 밀고 계셨다. 그렇게 할머니의 땀과 몸짓으로 만들어진 뜨거운 칼국수가 밥상에 올려질 때면 난 항상 청개구리처럼 맨밥에 김치를 올려먹곤 했다.


북적이는 가족들 틈바구니에서 난 칼국수 반대운동 줄곧 이어왔다. 한 번은 용기 내어 먹어보았지만 미끄덩거리는 국물에 밀가루 냄새가 진하게 밀려오는 칼국수의 맛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고명이라고 떠다니는 애호박이며 당근은 물컹하게 씹힐 뿐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칼국수를 만들 때면 함께 곁들이던 볶음김치였다. 신김치 특유의 알싸하고 톡 쏘는 맛을 감싸주는 달달한 설탕의 맛과 참기름의 고소함이 일품이었다. 칼국수를 먹는 날에만 기회가 있었기에 난 뜨거운 흰 밥 위에 볶음 김치를 올려먹었다.


증조할아버지부터 언니들까지 대가족의 북적이는 밥상머리에서는 그저 후루룩 후루룩 칼국수가 넘어가는 소리만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칼국수로 덮인 저녁 공기가 빨리 사라지길 바랐다. 우리 가족은 몇 그릇의 칼국수를 비웠을까..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 하나둘씩 타지로 떠났고 몇몇 어른들은 저녁 하늘 위 반짝이는 별이 되셔서 더 이상 북적이던 저녁밥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난 칼국수의 맛을 모른 채 20살을 맞았고 처음 사귀던 남자 친구는 나 때문에 그 좋아하던 칼국수를 먹을 수 없었다. 칼국수를 떠올리면 희어 멀 건한 국물과 불어있는 면, 물컹한 채소의 식감 때문에 도저히 애정을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비 오는 날이면 혹은 칼국수집을 지나가면 할머니 생각이 났다. 지나온 날카로운 세월이 만든 굳은살이 잔뜩 박인 투박한 손으로 홍두깨를 밀어 아기 속살만큼 하얀 칼국수를 만드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타지 생활을 하며 살아가던 중 할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병원을 찾았을 때 그저 침대 위에 조용히 숨을 쉬고 있는 할머니를 보게 되었다. 연신 칼국수를 밀던 그 힘찬 손은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칼국수를 사 먹어 보았다. 할머니 것과는 달리 깨끗한 멸치 육수에 가락국수같이 매끈한 면이 담겨있었고 노란 계란 지단이 예쁘게 썰려 장식되어있는 칼국수였다. 칼국수 면을 젓가락에 올리며 할머니와의 추억을 곱씹어보았다. 밥상 위 흰밥과 항상 놓여있던 칼국수 한 그릇, 집에 올 때면 반겨주시던 그 웃음과 밥은 먹었냐는 걱정, 힘차게 칼국수를 밀며 가족을 먹이던 신성한 노동.


지난날을 생각하며 칼국수는 그저 음식을 넘어 할머니의 사랑이었음을 깨달았고 고집불통인 내 모습까지 품어주던 넓은 마음이었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할머니를 찾았을 때 난 그 투박하고 고단한 손을 잡고 말했다.


“ 할머니, 저 이제 칼국수 먹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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