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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Oct 10. 2017

너 같은 딸  

[가깝고 먼 당신] 친정 엄마의 저주




겨울이었다. 엄마는 우리 집에 다녀가고 삼일 내내 전화를 하셨다. "시원이 자는 요가 너무 얇더라. 두꺼운 거로 사줘라." "애가 그렇게 자니까 바닥이 뜨거워서 자꾸 네 자리로 오는 거 아니냐." 나는 한숨 쉬며 대답했다. "엄마,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할게요." 밤낮없이 그 생각만 하는 엄마. "돈 부칠 테니까 사줘라"  매일 전화해서 반복하셨다. 난 짜증을 냈다.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요!" 



엄마는 언제나 더 해주지 못해 걱정이셨다. 반찬과 김치가 꽉 찬 택배 상자로는 모자랐다. 아빠와 같이 딸의 집에 오실 때마다 이불을 계절 별로 한가득 들고 오셨다. 주방에 살림살이를 사놓거나 갖다 놓으셨다. 냉장고 뒤엎어 정리하고, 화분갈이 해주고, 벽에 못을 박고, 베란다 청소를 해주셨다. 가구며 물건 배치를 이리저리 바꿔놓으셨다. 집에 내려가서 딸네 집에 없는 것을 곰곰이 생각하셨다. 프라이팬이 하나밖에 없다는 걸 기억해내시곤, 홈쇼핑에서 프라이팬 다섯 개 세트를 주문해 보내셨다. 이사 후엔 에어컨을 사주겠다고 하셨다. 엄마가 애써 보내주시는 것들은 나에게 쓸모가 없었다. 빨래 삶으라고 주신 큰 들통은 5년째 한 번도 쓰지 않다 결국 돌려보냈고, 프라이팬 세트는 환불했다. 에어컨은 주문 직전에 거부했다. 촘촘히 보내는 밑반찬을 끊기까지,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물건들을 단호히 거절하기까지, 그 성의 넘치는 호의를 되돌려 보내기까지, 6년이 넘게 걸렸다. “더 이상 아무것도 가져오지 마세요.”, “저희 집 물건들을 마음대로 바꾸지도, 청소도 하지 마세요”, "저도 결혼해서 내 살림 있다고요." 말했을 때, 부모님은 크게 충격받으셨다. 그건 나의 '마지막 독립 선언'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 후로도 종종 뭘 더 해주지 못해 안달이셨지만, 전만큼은 아니었다. 







나는 독립적인 딸이라 자부했다. 

대학 졸업하며 경제적 독립을 일 순위로 삼았다. 아빠는 빠듯한 월급을 쪼개며, 엄마는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나와 내 동생을 객지의 사립대에 보냈고 생활비를 주셨다. 졸업하고 바로 취업했고 서울에 방을 얻었다. 엄마는 대출받아 내 원룸 보증금을 주셨다. 첫 회사는 월급이 백만 원이 채 안되었다. 생활비와 월세를 빼면 학자금을 갚을 수 없었다. 새벽마다 이력서를 썼다. 신입 공채 사원으로 다시 취업했고, 몇 년 안에 학자금을 모두 갚았다. 부지런히 돈을 모았고, 결혼하면서 엄마에게 받은 보증금을 모두 돌려드렸다. 남편과 나는 일하며 모아둔 돈으로 전셋집을 얻었고, 몇 년 후 부모님 도움 없이 경기도에 작은 주택을 장만했다. 나로선 마땅한 일이었다. 이렇게 어엿한 성인으로,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는 자식으로 컸는데, 엄마는 왠지 나만큼 기뻐보이지 않으셨다.

 


엄마는 나를 만나면 친구 자식들의 바람직한 사례를 늘어놓는다. 영어 강사였는데 부모 말 듣고 교대 다시 가서 선생이 되었고, 나라가 보내주는 돈으로 연수까지 다녀왔다더라. 아들이 사귀던 여자애가 마음에 안 들었는데 다리가 다쳐 그 참에 파혼시켰다더라. 본인이 원하는 조건의 며느릿감으로 결혼시켰는데 그렇게 며느리가 이쁘다더라. 뉘 집 아들이 결혼했는데 무리해서 집을 사줬지만 소원 푼 것 같다더라. 엄마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대꾸했다.  “엄마 그래서 부러워? 그렇게 부모가 결정해주는 대로 살면 나중에 꼭 부모 원망하더라. 나는 엄마, 아빠 탓은 안 하잖아. 내 선택에 대해선 내가 책임져.”  


엄마는 말했다. “너는 그렇게 잘나서 아빠가 가라는 교대 안 가고 니 맘대로 대학 갔냐? 교직이라도 들었으면 그렇게 회사 다니며 고생 안 하지. 전공 바꿀 때도 너는 혼자 다 결정하고 나중에 알려줬어. 또 남들이 못 들어가 안달인 회사, 너 잘나서 부모한테 상의 한마디 안 하고 그만뒀냐? 그렇게 잘나서 일 안 하고 집에 있냐. 이사할 때도 한마디 안 했어. 난 이서방이 집에 못 들어오니까 너랑 시원이 전주로 데려올랬는데 그새 집을 계약했더라. 너는 언제나 그래. 네가 언제 상의하고 결정했냐. 다 니 맘대로 하지. 너는 엄마를 아주 무시해.”  내 인생이었으니까. 결정은 내가 해야 하는 것이니까. 선택도 내가 하는 것이니까. 책임도 내가 지는 것이니까. 그렇게 했다. 그런데 엄마는 당신을 무시한다고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요." 

엄마의 말 끝마다 이렇게 대답했다. "잠바 안에 옷을 더 입어라, " 할 때도 "알아서 할게요." , "김치가 익었으면 옮겨놔라" 할 때도 "알아서 할게요."  쉴 새 없는 엄마의 간섭을 자르고 싶었다. 우린 자주 다퉜다. 만나면 두 밤을 못 넘기고 언성을 높였다.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나는 10분이 멀다 하고 쏟아지는 엄마의 잔소리가 지긋지긋했고, 엄마는 당신 말을 듣지 않는 딸을 향해 울분을 토했다. 싸울 때마다 레퍼토리는 달라도 흐름은 비슷했다.  나는 딸로서 인생을 지지받지 못한다 느꼈고, 엄마는 엄마의 자리를 인정받지 못한다 느꼈다. 우리 모녀는 그렇게 이십 년 가까이 서로의 자리를 두고 밀쳐냈다가, 끌어당기다가를 반복했다. 








나는 엄마가 유난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엄마가 내게 뭘 못하게 하거나, 강요한 적은 없었다.


고등학교 때 영어학원도 수학학원도 아무 데도 가지 않겠다 해도 그러라고 하셨다. 미대에 가겠다 할 때에도 학원에서 저녁까지 먹을 도시락을 말없이 싸주셨고, 1년 쯤 다니다가 다시 인문대에 가겠다고 변덕 떨 적에도 한숨만 내쉬셨다. 시험 전날 공부 안 하고 비디오를 보고 있을 때도, 용돈 받으면 참고서는 안 사고 음반만 잔뜩 사가지고 올 때에도, 혼난 기억이 없다. "공부 좀 해라"라는 말조차 듣지 않고 컸다. 엄마가 행여 내 인생을 간섭할까 칠색 팔색 해왔지만, 사소한 습관부터 인생의 중대한 결정까지, 자식의 의지를 꺾으며 강요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속으론 불만을 쌓아가셨더라도.  


엄마에겐 그 불만을 해소하는 방식이 '오히려 더 해주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관여할 수 있는 자식의 인생이란 고작, 반찬을 해주고, 냉장고를 한바탕 뒤집어 엎어주고,, 살림살이를 이리저리 만지고, 필요한 물건을 보내주는 것이었다. 끼어들 틈을 주지 않던 딸의 인생에, 뒤늦게라도, 틈만 나면, 어떻게든, 김치 한 포기 자리라도 넣고 싶어 하신다.. 그런 베풂에도 나는 '알아서 할게요'라고 말했다.  



자식 인생의 중대사에 소외되었던 엄마의 권한은 사소한 충고와 관심에서조차 밀쳐졌다. 엄마는 번번이 나에게 졌다. 딸은 기어코 엄마를 이겨먹었다. 그러고선 아쉬울 땐 엄마를 호출했다. 아이가 아플 때, 내가 아플 때, 당연하게 엄마를 찾았다. 부엌에 내내 서 있는 엄마의 뒷모습을 외면하면서도 김치가 떨어지면 주문했다. 엄마의 권한은 거부하면서, 엄마의 역할을 찾았다. 딸자식이 '알아서 한다'라고 할 때마다 성내던 엄마는, '너는 엄마에게 너무 의지한다'고도 말했다. 도무지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가 공존했다. '자기밖에 모르고 이기적인 딸'이기에 가능했다. 말 끝마다 대꾸하고, 거부하고, 제멋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버르장머리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데다, 정작 아쉬울 땐 부모를 찾아 부려먹는 딸년을 보다 못한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자식이 아니라 원수다. 전생에 뭔 죄를 졌길래 너를 낳았냐."  "자식에게 이런 취급받으면서 왜 살아야 하냐."  난 내가 무엇을 그렇게 크게 잘못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는 부산스레 설치는 손녀를 보며 말씀하시곤 한다.
"너도 뭐든 자기가 혼자서 하려고 했어. 동생은 꼭 엄마가 해줘야 했는데 넌 그렇게 혼자서만 하려고 하더라고. 그래서 젓가락질도 일찍부터 했고. 기특하다고 내버려두었는데, 그래서 네가 젓가락질을 지금도 제대로 못하잖아. 괜히 일찍 쥐여줬어." 


이 레퍼토리는 지금껏 수백 번도 넘게 들었다. 엄마는 뭐든 혼자 하겠다는 딸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셨지만 지금은 잘못했다고 말하신다. 부모랑 일찍 떨어져 가족끼리 사는 법을 모른다고, 부모 말 듣는 법을 모른다고, 자식 뜻대로 살게 둔 것을, 잘못 키웠다고 말하신다.  


딸이 결혼자금을 도와줄 필요가 없다 말했을 때, 엄마는 반기기보다, 서운해하셨다. 무리해서라도 해줘야 부모로서 도리라고 여기셨다. 빚처럼 두고두고 걸려 하셨다. 그럴 필요 없다고 누누이 말해도 갚아줄 날을 기다리셨다.  새 집으로 이사올 때 '결국' 돈을 받았다. 필요한 물건을 사라고 주셨다. 엄마는 묵은 빚을 갚는 것처럼 후련해하셨다. 반면 나는 개운치 않았다. 필요 없는 돈이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묵혔던 '그 자리'를 드린 것 같아 안도했다. 엄마가 해주고 싶어 하는 걸 하도록 해주는 것. 그 어려운 과제를 받아들였다. 



 "내가, 내가, 나도 할 수 이 떠! 나 아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네 살 딸. "엄마, 나 애 아니에요. 내가 알아서 해요"라고 말하는 서른일곱 살의 나.  "나 네 살 언니야! 엄마, 하지 마! 저리 가!"라고 말하는 나의 딸.  "이제 나도 성인이에요. 그러니 제발 제 살림은 건들지 마세요. 저도 할 수 있어요 "라고 말하는 나.  부모님은 그러셨다. "너를 도와주려고 그랬다. 우리에겐 네가 아직 너무 어린애 같아."


독립을 했다지만, 정작 독립은 멀리 있었다. 간섭으로부터 자유가 독립은 아니었다.  원조와 베풂에 대한 거부도 아니었다. 여전히 부모를 주는 사람, 자식은 받는 사람, 간섭하는 부모, 도망가는 자식에 위치하는 한 독립은 요원했다. 부모와 자식은 벗어날 수 없는 관계이다. 그 점을 인정하고, 그분들의 간섭을 수긍하되 흔들리지 않아야 했다.  그분들의 사정을 존중하되 나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했다. 자식은 부모에게 빚을 지지만, 부모 역시 자식에게 빚진다는 사실을 , 서로가 서로에게 빚지고 갚기를 반복하는 과정을 받아들여야 독립이었다.  부모에게 '반항'하는 한 여전한 '아이'였다. 치기 어린 반항이 아닌 정중한 거절을,  냉정한 감정 분리를 해야 했다. 







"너 같은 딸 낳아서 당해봐라"  


엄마의 '저주'대로, 나는 하는 짓도, 생긴 것도 나 같은 딸을 낳았다.  조금만 못하게 해도 신경질 내며 소리 지르는 딸.  맘먹으면 해야 하는 황소고집인 딸. 신발 좌우를 바꿔 신고 바지를 거꾸로 입어야 직성 풀리는 딸. 밥 먹자, 옷 입자, 손 씻자, 머리 묶자, 하면,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시여-"라고 대답하는 딸. 보아하니 미운 네 살이어서가 아니라 내 딸 이서 그런 것 같다. 하지 말라 하면 보란 듯이 더하고, 하라고 하면 어김없이 안 하는 녀석. 나를 보는 것 같다. 


"그래도 시원이는 너보다 훨씬 순한 거여. 너는 친척집 가면 밤새 울었어. 너 데리고 어디를 갈 수 있어야지. 아휴. 동생 태어났을 땐 말도 못했다. 동생 따라 젖병에 먹겠다고 밥을 안 먹어. 숟가락만 보면 고개 돌리고 울어서 내가 일년 반을 잡곡 다 쪄서 갈아서 젖병에 타줘서 먹였다는 거 아니냐. 젖병 젖꼭지를 크게 뚫어줘서 그거 분유처럼 빨아먹었다. 내가 그렇게 너를 키웠어. 시원이는 순한 거여" 



이 아이도 사춘기가 되면 방문 틀어막고 들어가, 밥 먹을 때 빼곤 얼굴도 안 보여주면서 몇 년을 보낼지 모른다. 한마디 상의 없이 진로를 결정하고 원서를 쓰고 통보할 수도 있다. 따로 떨어져 살 땐 연락 한 줄 없다, 어느 날  "이 남자와 결혼했어요." 하고 불쑥 찾아올 수도 있다. 중요한 결정마다 어떻게든 부모 이겨 먹어가면서 내 속을 벅벅 긁어댈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마음에 있는 말을 얼마나 삼킬 수 있을까. 고작 한다는 말은, "너 혼자 큰 줄 알아??? 내가 너 키울 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이겠지. 지금 엄마가 하듯이 먼발치에서 엉거주춤 서서, 마음 조리며 바라보다, 가슴 쥐어뜯다, 호통 치다, 그렇게 져주는 수 밖엔 없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엄마는 나에게 하는 전화를 망설이신다. 받지 못한 전화에 장문의 문자를 남기신다. 나는 내 딸에게 전화를 걸고 싶을 때, 얼마나 참을 수 있을까. 참고 참고 또 참다가 안부를 물으면 내 딸은 지금 나처럼 시큰둥하게 대답하겠지. 


"엄마, 나 잘 살고 있어요 걱정 마세요." 그때 나는  딸의 잘 살고 있음을, 정말 잘 살고 있다 믿으며, 얼마나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지켜봐 줄 수 있을지 글쎄, 자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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