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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Nov 27. 2017

게으른 밥상을 위한 변명  

[단순하고 게으르게] 요리가 싫은 주부의 게으른 밥상  


요리 안 하던 여자에서 요리해야만 하는 여자로 

혼자 살 땐 가위로 야채나 고기를 잘라 냄비에 풍덩하곤 했다. 칼이나 도마의 필요성을 몰랐으므로, 결혼할 때, 쓰던 ‘과도’만 들고 왔다. 아이 없이 지낸 삼 년간 우리 부부는 집밥을 거의 먹지 않았다. 평일엔 매일 야근을 했고 주말이면 아침 겸 점심은 근처 카페에서, 저녁은 배달 치킨으로, 다음날 아침 겸 점심은 전날 남은 걸로 해결했다. 


아이를 키우며 밥을 해야 했는데 죽 이유식부터 난관이었다. 각종 야채를 다듬고 씻고 단계별로 입자를 달리하며 다지고 물 양 조절해가며 죽 만드는 걸 익혀갔다. 지금이야 눈 감고도 할 수 있지만, 당시엔 이유식 만드는데 두세 시간 내리 부엌에 서 있을 만큼 서툴렀다. 이유식이 제일 어려운 줄 알았는데 산 너머 산. 유아식이란 장벽을 만났다. 된장국은 물론이고 미역국, 콩나물 국조차 못 끓였고, 시금치나물 무칠 때 간을 얼마나 해야 하는지, 무 껍질을 어느 정도 벗겨야 하는지, 채썰기나 나박 썰기를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다. 못하는 건 배우면 된다는 일념으로 밤늦도록  요리책을 뒤적거리며 불 앞에 서 있었다. 






가족 중 누구 하나 식탐이 없었다. 

아이는 미각이 장금이어서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오거나 레인지에 데워주면 귀신같이 알고 입도 대지 않았다. 쫄쫄 굶겨도 제 입맛이 아니면 그릇을 밀쳐내며 온갖 패악을 부렸으니, 졸졸 따라다니며 먹이기, 동영상 보여주며 멍 때릴 때 입에 쑤셔 넣기, 안 해본 것이 없었다. 


남편은 매일 늦게 퇴근했고 아침엔 출근하기 바빠, 평일이면 집에서 한 끼도 안 먹는 ‘영식이’였다.(세 끼 먹는 남편을 ‘삼식이’라고 부른단다) 입도 짧았다. 결혼하고서 제 입으로 배고프다고 말한 적이 열 번이나 될까. 혼자 있는 날엔 멀쩡하게 해둔 반찬은 입에 대지 않고 과자, 라면, 만두, 편의점 샌드위치로 때웠고, 기껏 차려줘도 싹싹 긁어먹으면서 더 달라고 한 적이 드물었으며, 한 시간 내내 깨작거렸다. 그는 연애할 적에도 나보다 적게 먹는 남자였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안 그래도 요리가 어려운데 의욕조차 떨어졌다. 음식을 만들어도 맛있게 먹지도 않고, 수고를 알아주지도 않고, 설거지만 산더미처럼 쌓인 채 버리기 십상이라면 대체 왜 해야 하는지 회의가 들었다. 식구들 입에 들어가는 음식을 하는 일이 전혀 즐겁지 않았고, 잘 먹을지 안 먹을지 모르는 반찬을 매번 하기에 지쳤고, 끼니가 다가오면 가슴이 콱 막힐 만큼 스트레스가 쌓였다. 




하기 싫다는 걸  인정하자.


나는 열정도 빨리 달아오르지만 포기도 빠른 편이다. 입 짧은 식구들을 위해 실력을 갈고닦으며 어떻게든 잘 먹이려 노력하는 주부도 있겠지만, 나에게 요리는 비용과 노력 대비 효과가 현저히 떨어지는 활동이었다. 더 노력할 수도 있었겠지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정하기로 했다. "요리가 싫다."  


음식 잘하는 엄마 밑에서 컸기 때문에 모든 엄마들이 우리 엄마처럼 요리를 잘하는 줄 알았다.  어떤 친구들이 매일 같은 반찬을 싸오는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우리 엄마 밥은 맛이 없어." 또는 "우리 엄마 요리 못해" 라고 했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엄마가 되어보니 내가 바로 요리를 좋아하지 않는 엄마였다.  


요리가 다른 일의 우선순위에 밀리는 엄마. 매일 똑같은 반찬을 주는 엄마. 요리가 도무지 즐겁지 않은 엄마였다 전업주부라고 해도 매일 새로운 반찬 만들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란 걸  전업주부가 되고 나서야 알았고, 이건 아무리 자식을 사랑한다해도 누군가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어떻게 엄마가 되어서 자식 새끼 밥 해주는 걸 귀찮아하고 못할 수 있어.' 라고 말할 수도 있고 나도 엄마가 되어보기 전엔 그렇게 생각하곤 했는데, 아무리 사랑해도 잘 못해주는 일도 있다는 걸 알았다.  싱크대 찌든 때를 닦을 망정 곰국은 끓이기 싫은 주부인 거다.  


이런 나를 인정하고 더 이상 보람과 성취를 못 느끼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로 했다. 부엌에 서 있는 사람은 나, 요리하는 사람도 나인만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만큼, 무리하지 않는 선에만 하기로, 식구들의 장단에 맞춰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느니 가족들을 나에게 맞추기로 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일찍 보낸 이유는 점심 한 끼를 해결하고 싶어서가 가장 큰 이유였다. 구차한 변명일지 몰라도 절박했다. 오전 간식, 점심, 오후 간식까지 먹고 오는 어린이집은 구세주였고, 여러 아이들과 어울려 먹으며 까다롭던 입맛도 조금씩 좋아졌다. 활동량이 늘면서 먹는 양도 늘었다. 아침은 간단히 국에 밥 말아 주거나 우유에 빵, 플레이크, 전날 남은 반찬으로 볶음밥을 해주었고, 저녁식사만 새로 음식을 한두 개 만들었다. 


잘 먹다, 안 먹다 오락가락 얼렁뚱땅 시간이 흘러 아이는 네 살이 되었고, 매운 것, 아주 질긴 것, 딱딱한 것을 빼곤 어른이 먹는 음식도 같이 먹게 되었다. 무엇보다 갖은 협박과 회유도 통해 편해졌는데, 이제 자기가 먼저 “밥 먹었으니까 동영상 보여줘” “나 밥 다 먹었으니까 빵, 과자, 사탕, 초콜릿 그런 것 좀 줘봐”라며 뻔뻔히 요구한다. 먹는 걸로 협박과 보상을 하지 말라고 육아서에 쓰여있지만, 나는 기쁜 마음으로 사탕을 꺼내어 아이 손에 쥐여준다. 


남편에겐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어엿한 성인 입맛까지 내가 잡으려 노력해야 하나. 혼자 챙기지도 않고, 챙겨줘도 잘 먹지 않는 아침은 진작에 포기했다. 같이 야식을 먹자고도 하지 않고, 남편을 위해 별도의 요리를 하지도 않는다. 줬는데 기대만큼 안 먹어 속상하느니 차라리 안 해주고 실망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게으르고 쉽게 가자. 

반찬을 사 먹으며 숨통이 조금 트였다. 국산 식재료를 쓰며 화학조미료 넣지 않는 반찬가게를 찾아 젓갈, 김치, 사골곰국부터 멸치조림, 콩 조림, 장조림, 우엉조림도 주문하곤 한다. 아이에겐 가끔 밑반찬을 사 먹이는 게 더 다양하게 먹이는 방법이기도 했다. 맞다. 나는 멸치조림도 못하는 주부다. 생협에서 나오는 짜장이나 볶음밥, 돈가스도 냉동실 비상식량이다. 


그래도 명색이 가정주부인데 사 먹지만은 않는다. (그렇다, 전업주부도 반찬, 사 먹을 수 있다.) 집밥을 할 땐 쉽고 간편하게 하려 한다. 삼치구이에 백김치와 밥. 미역국에 계란말이에 밥. 웬만하면 한 끼에 밥 하나. 반찬 한두 개 넘지 않는 단출한 식단. 채소 하나 단백질 반찬이면 되지 뭐. 반찬 하기 귀찮은 날엔 주먹밥이나 볶음밥을 한다. 세 살까지만 해도 쳐다보지도 않더니 이제 같이 주먹밥을 동글동글 뭉치는 재미로 덥석덥석 입에 넣고, 자기가 썬 호박이라며 푹푹 퍼서 먹는다. “사람 됐다!” 


냄비 하나에 야채와 고기를 다 때려 넣고 한 번에 끓이는 ‘저수분 요리’도 선호하는데 무쇠냄비가 무겁긴 해도 2인용 사이즈로 하나 있으면 이럴 때 요긴하다. 국이나 찌개를 끓일 땐 다시마부터 양파, 애호박, 버섯을 한번에 넣고, 닭찜이나 수육을 할 때도 재료 쑤셔 넣고 뚜껑 닫고 불 올리고 기다리면 그만이다. 별다른 조리 기술 없이도 순전히 잘 우려난 재료만으로도 깊이 있고 감칠 맛이 나기 때문에 애용한다. 가스레인지가 아닌 타이머 기능이 있는 전기레인지를 쓰면서 요리가 훨씬 쉬워지기도 했는데, 정확히는 요리할 때 불앞에 내내 서 있을 필요가 없는 것만으로도 해방감이 느껴졌다. 






최소한의 주방용품이 최대 효율을 낳는다. 

요리가 간편하고 쉬워진 데는 그릇, 조리기구, 냄비, 반찬통을 최소한으로 줄인 공도 매우 컸다. 요리도 싫어하는 주제에 무슨 냄비와 프라이팬이 사이즈별로 있고, 쓰지도 않는 거품기부터 작고 큰 국자까지, 조리 도구만 한 박스였던지. 조리할 때마다 냄비도 조리기구도 새로 꺼내 쓰다 보니 설거지가 늘 산더미였다. 


이사하며 대대적으로 정리했다. 쓰지 않는 냄비와 그릇, 반찬통을 필요한 지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결혼 후 두 번이나 썼을까 싶은 곰솥과 전골냄비도 후련하게 버렸다. 8인용 식기세트에서 서른 개 가까웠던 접시를 여섯 개 이내로 추렸다. 고맙게도 이사 갈 날이 다가오며 국그릇 밥그릇이 하나둘 깨져 3인용만 남았다.  국자 하나, 뒤집개 하나, 가위 하나, 칼 하나와 조리 도구 몇 개, 중간 크기 냄비 두 개, 전기밥솥, 프라이팬 하나만 남기니 설거지가 놀랄 만큼 줄어들었다. 쓴 그릇을 씻지 않고서는 담을 그릇이 없으니 설거지를 틈틈이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요리가 간소화되었다. 냄비가 모자라니 음식을 더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고, 반찬통이 적으니 음식을 많이 해둘 수 없었고 바로바로 비워야만 했다. 주방용품의 최소화는 냉장고 안을 여유롭게 했고, 버려지는 식재료와 음식도 줄였다. 





냄비 전부 
 그릇 전부  
400리터 냉장고의 냉장실  / 김치냉장고는 없다 



잘 차려 먹기보다 편하게 먹자. 

끼니만 다가오면 먹지도 않았는데 속이 꽉 얹히곤 했지만 이제 이왕 할 밥이라면 조금은 즐겁게 한다. 즐겁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요리를 어렵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론 반찬을 사 먹고, 찬을 해도 한두 가지를 넘지 않으면서, 주말이면 남편과 한 끼씩 번갈아 하거나, 하루씩 나눠 하면서 요리가 할만해졌다. 심지어 식비 지출도 절반으로 줄었다. 


매끼 꼭 국에 주 요리 하나 두고 먹어야만 하는 걸까. 갓 지은 밥에 된장 발라 쌈 싸먹어도 그만이고, 야채 듬뿍 넣은 영양밥에 간장 비비고 김치 하나 놓고 먹어도 그만 아닐까. 한 시간 내내 했는데 15분 만에 먹을 거라면, 차라리 15분 걸리는 요리를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남편이 먹을 게 없다고 투덜거릴 때마다 허전하고 썰렁한 식단이야말로 건강에 더 좋다며 정당성을 확보한다. 성인들에겐 영양부족이 아니라 영양과다가 문제라며, 담백하고 깔끔하고 소박하게 먹어야 한다고 우긴다. 궁하면 통한다고 집에 먹을거리가 빠듯하니 입 짧은 가족들도 결국엔 ‘있는 것’에서 먹는다. 싹싹 먹는다. 안 먹으면 어쩔 건가. 본인만 손해인데. 더 먹고 싶어도 없다. 남겨도 보관해둘 데가 없어 조금만 만드니까. 


한 상 거하게 차리며 식구들 입에 밥 들어가는 기쁨으로 산다는 프로 주부들 앞에 나는 작아진다. 어미로 해줄 수 있는 건 자식 새끼 입에 들어갈 음식 뿐이라고 하는 엄마들 앞에서도 작아진다. 남편 아침을 차려주냐는 질문에 우물쭈물 말을 피한다. 단출한 밥상이라고 해서 사랑까지 초라하진 않은데 왠지 나의 사랑은 볼품없어지는 것 같다. 왜 엄마의 사랑을, 아내의 사랑을 '밥'으로 증명하려 하려 하는 걸까. 왜 그다지도 '밥'에 목숨 거는걸까. 그렇다고 굶기는 것도 아닌데!  


나에겐 비록 그럴듯한 찬이 없는 밥상이라도, 세 식구가 모여 깔깔거리며 웃는 밥상이면 됐다.  잘 차려 먹는 것보다 만들 때도 먹을 때도 속 편한 것이 때론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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