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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Jun 26. 2018

육아는 원래부터 이랬을까

[요즘의 육아가 힘든 이유 (2)] 의식적인 육아의 탄생  

이전 글 (  손빨래도 안 하면서 뭐가 힘드냐고요?)에서 요즘 시대의 육아가 힘든 이유를 알아보자는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이번 글부터 본격적으로 어느 면에서 육아가 힘들어지고 있는지 알아보려 합니다. 





잘 먹히고 입히고 재우고 놀아주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요즘의 육아가 힘든 이유(2) - '아이의 미래를 만들어라' 는 명령


우리 집엔 태어난 지 만 4년 된 '어르신'이 한 분 계신다. 툭하면 울고 소리 꽥꽥 지르고 먹다가 뱉어내고 쉴 새 없이 어지르며 모든 것을 제 기분 내키는 대로 한다. 그 상전 옆을 졸졸 따라다니는 두 명은 배고프려나, 까불다 넘어지려나, 감기 들지 않을까 전전긍긍. 천방지축 상전에게 시달리면서도 귀엽다고 물고 빨고 하는 걸 보면, 이 사람들, 아무래도 뭔가에 단단히 씌었다. 

"쪼그만 것에게 쩔쩔맨다." 


부모님은 남편과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찼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의 아이를 사랑하는 '다른 방법'을 우린 배우지 못했다. 맞춰주고, 받아주며, 먹이고, 재우고, 놀아줬을 뿐이다.  

누군가는 이런 양육 태도를 '유난 떤다'고 하거나 '부모가 권위를 찾지 못해서'라고 꼬집겠지만, 약간의 정도의 차이일 뿐, 이 말엔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보호하고 지켜주고 사랑을 '듬뿍' 줘라.' 그 누구, 이 숭고한 사랑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아닐 수도 있단 말인가?                



프랑스 화가 조르주 라지(Georges Laugee)의 Le repas des moissonneurs(1876) ⓒ wikimedia commons



맞다. 아니었다. 현대의 부모들과 달리 전 근대 농촌 사회에서만 해도 아이들에 대한 유별나고 지극한 관심은 매우 낯설고 생소했다. 아이들은 단지 어른의 축소판일 뿐이어서 아이라는 이유로 배려받거나 보호받지 않았다. 자식도 '경제적'인 이득 때문에 낳았는데, 서민들에겐 노동력이었고 귀족들에겐 가문 유지에 필요한 자손이었다. 적절한 피임도 할 수 없었고 유아사망률도 높았기에 일단 낳고 봐야 했지만 때로 너무 많은 자식들은 부모에게 '짐'이었고 태어나자마자 버려지기도 했다. 

아이들에 대한 기본 태도는 '무관심'으로, 따로 들이는 금전적 비용과 시간은 없었다. 아이들은 밭일과 들일 사이에서 방치된 채 부모의 일을 같이 나눠 하며 커갔다. 부모가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보고 기질은 어떤지, 말은 느리지 않은지 하며 발달을 헤아리는 일도, 아이들과 감정적으로 얽혀들 여유도 없었다.  

지금처럼 엄마 한 명이 아이를 온종일 끼고 있는 경우 역시 없었다. 건강한 젊은 여성은 너무도 귀중한 노동력이었기에 아이 돌보기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되었다. 옛날이야기 같지만 불과 30~40년 전 한국 농촌사회에서 나의 큰어머니가 오 남매를 키운 방식이기도 하다. '육아'라는 말조차 없던 시대였다. 

특정 연령대를 '아동'으로 부르며 어른과 구분하고 특별한 보호와 관심을 주기 시작한 건 서구에서도 백 년도 되지 않는다는 것. '근대의 기획'으로 탄생한 노동자, 주부, 회사원, 청소년, 학생... 이 모든 단어처럼 '아동'에게도 연령과 위치에 맞는 표준적인 행동과 과업이 주어졌고 부모들에게도 할 일이 생겼다.  


@pixabay



의식적인 육아의 등장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정체성과 소속감을 굳건하게 유지해주던 종교와 전통의 영향력이 상실되고, 신분제가 서서히 붕괴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야 할 '의무' 역시 떠맡게 되었으니, 그 중심에 '교육'이 있었다. '배워야 산다!' 타고난 신분을 극복할 가능성이 열린 만큼 아이들의 결함은 더 이상 신의 실수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숙명도 아니었다. 

'자식의 단점을 교정하고 특기를 찾아주고 증진시켜라, 그것이 바로 부모인 당신들이 해야 할 의무이다!' 

이제 자식의 의식주 해결은 기본일 뿐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신체, 인지 발달을 위한 장난감, 책, 교육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고 주기적으로 갱신시켜줘야 하고, '예의 바르고 밝은 인성'을 가질 수 있도록 아이들의 정서를 늘 예의주시하고, 부모 자신의 태도와 말투도 검열해야 한다.  

뱃속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인생 개조 프로젝트'에는 태아, 신생아, 영아, 유아, 소아, 어린이로 분류된 각 연령에 따른 발달 과업이 치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 속에 우리가 빠진 함정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제공되는 각종 교육은 더 나은 인생,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게 할 방법이면서 사실상 산업 사회에 적합한 노동자(일꾼, 좋은 말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훈육에 목표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아이들을 위한 모든 노력의 뒷면엔 '성과에 대한 압력'이 자리한다.  

언제 걷고 말하느냐부터, 언제 문자를 습득하고 책 읽기가 가능한지, 사회적 관계를 얼마나 원만히 맺는지가 일종의 육아 '성과' 지표처럼 여겨지게 되고, 표준적인 발달 기준에 못 미칠 경우, 아이에게 심각한 신체적·정신적 하자가 있는 건 아닌지도 유심히 봐야 한다.  
              

아이를 낳으면 절로 큰다, 제 밥그릇 알아서 찾는다는 말은 옛 말이 되었다. '육아'는 단순한 아이 돌보기를 넘어 한 인간의 신체, 정서, 사회성 발달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과업이 된 것이다. 



-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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