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매실 Jul 01. 2018

엄마들이 죄책감이 시달리는 이유

[요즘의 육아가 힘든이유 (3)] 아이의 미래를 만들라는 명령  

(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


- 이전 시대에 비해 요즘 엄마들은 각종 가전제품을 비롯하여 사회 복지의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더이상 천기저귀를 빨지도 않고 아이 업고 일해야하는 것도 아니지요. 무상보육으로 어린이집에 맡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엄마에게 부여되는 '육아'는 과중하고 많은 엄마들에게 육아는 힘겹습니다.

 "제 밥그릇 제가 타고 난다, 낳아두면 알아서 큰다"고 하지만 요즘 육아엔 해당되지 않습니다. 육아는 어떻게 달라진 걸까요. '요즘의 육아가 힘든 이유'에선 어린아이를 키우며 겪는 못 자고 못 먹는 육체적 어려움 이외에 '육아 방법'과 '환경조건'이 과거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엄마 개인의 능력에 한정되었던 기존 육아법의 관점에서 벗어나 달라진 환경이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보려 합니다.  




자식의 전문가가 되어라  

요즘 엄마들처럼 나 역시 아이 기르기에 관해 겪어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나의 아기를 만났다. 나의 아기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지만 잘 키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엇갈렸다. '정성스럽게 이유식을 만들어주면 편식 없는 식습관이 잘 잡힐까?', '단호하고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면 아이가 내 말을 잘 들을까?' 예민하고 까다로운 아이를 순한 양처럼 길들였다는 엄마들의 간증과 육아서의 정보를 취합해보면 모든 건 나의 잘못이었다. 

양육지침을 주도하는 발달 심리학의 가설들은 일생의 첫 몇 년을 놓치면 평생 발전할 기회를 잃는 거라 했고 엄마만이 애착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기에, 나는 어린이집에 일찍 보낸 것에도 늘 죄책감을 가져야 했다.  

모든 부모 교육과 육아 정보,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엄마는 자신의 아이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아이의 기질, 식성, 체질, 발달 사항을 면밀히 관찰하고 파악해서 적절한 양육 기술과 태도를 행해야 하지만, 아이가 다섯 살이 된 지금까지도 난 아직 내 자식을 모르겠다. 기관지가 약하고, 활동적인 놀이를 좋아하지만 겁도 많고, 미술에 적성이 있는 거 같기도 한데... 육아·의학·심리학 지식들은 계속 갱신되고, 새로운 학습법, 갖가지 상품이 하루가 멀다고 쏟아지기에, 내가 아이에 대해 알아야 할 것과 아는 것의 간극은 계속 벌어진다.  

더군다나 때맞춰 먹이고 재우는 일에 정성을 들임에도 두 돌 무렵 지인이 물려준 전집 이외에 새로운 책을 읽어주지도 않고, 다섯 살 아이들이 슬슬 익혀간다는 한글은 시작조차 안 했으며, 과자나 가공식품도 잘 먹이고, 유튜브도 자주 틀어주며, 때로 아이에게 소리도 지르는 나는, 다른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방치하는 건 아닐까, 하고 마음이 불편해진다. 

"육아는 항상 쌍방 관계이기 때문에 '아이에 대한 과학의 정복'은 엄마에 대한 정복이기도 하다. 이론들의 그물이 아이에게 던져지지만 엄마들이 그 안에 붙잡힌다." -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p228 




거절할 수 없는 명령  

ⓒ unsplash



전문가의 충고 따위 무시하면 그만이지 않느냐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온갖 매체에서 쏟아내어 일상 깊숙이 침투하는 '절대명령'을 보란 듯이 거부할 수 있을까. 그 메시지들은 "아이의 요구를 무시하면 아이에게 해를 줄 것이고 아이가 삶에서 성공할 기회를 망치는 것이라는 후렴을 반복"(위의 책, p229)하고, 메시지를 거절하는 부모들에겐 힐난과 비난이 돌아온다. '아이를 방치한다.' '부모가 저 모양이니 애가 저렇지.' 

이런 상황에서 오로지 '비정하거나 독하거나 나태한(그렇게 보이는) 엄마'들 혹은 인터넷을 비롯한 매체나 주변관계를 끊는 엄마들만이 이러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다. 그렇다고 아이에게 쩔쩔매면 유난스럽거나 예민한 엄마라고 한다. 그래서 예의 곁들이는 조언을 보면 관심과 사랑으로 '적절한' 육아를 행하면서도 아이에게나 주변에 부담스럽지 않도록 양육자 본인이 우선 '즐거워야' 한다니, 대체 그 경지는 어디쯤일까.   

무관심 속에 컸고 때로는 원치 않던 짐이었던 자식들은 이제 역사상 유례없는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 독일의 사회학자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이 말했듯 "다른 목표들이 임의적이고 내세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현세의 희망조차 덧없어진 이곳", 또 너무나 불안정하며 계산적인 세상에서, 아이는 단단한 발판이며 그 자체로 삶의 의미이며, 내면의 성장을 추동하는 기회이자 기쁨이다. 경제적으로는 쓸 데가 없는 자식들은 이제 어마어마한 "심리적 효용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덕에 우린 또 다른 대가를 치른다.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에서는 아이를 돌보는 물리적 일이 다소 쉽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가전제품, 가공음식, 종이기저귀). 하지만 이에 대한 대가로 해결해야 할 새로운 문제들이 예기치 않게 생겨나고 있다... 요즘 가족은 역사상 유례없이 육아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p230 

내 아이의 전문가가 되어야만 한다는 압력, 아이의 결함을 교정할 수 있다는 확신의 강요, 숱하게 쏟아지는 각종 지식 습득. 바로 '아이의 미래가 부모에게 달렸다'는 '절대 진리'로의 수렴. 

온갖 판관들이 사방에서 도끼눈을 뜨고 지켜보는 와중에, 가장 소중한 존재에 대한 이러한 요구를 과연 얼마나 거절할 수 있을까. 현대의 육아가 고달픈 이유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 



덧붙이는 글 | 책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정상적인 혼란>(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 울리히 벡), <부모로 산다는 것>(제니퍼시니어), <아동의 탄생>(필립아리에스)을 참고했습니다.          





*오마이뉴스에 실렸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육아는 원래부터 이랬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