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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Oct 27. 2018

루저 엄마의 고백    

[엄마 되기의 민낯] 이도 저도 아닌 그냥 엄마가 되었다  




아이를 잘 키울 줄 알았다. 쿨하게. 엄마가 되면서 자아를 잃지 않으면서. 



첫 돌이 지나면 내 일을 시작할 줄 알았고 아이는 세 살 되면 혼자 밥을 척척 먹고 자기 방에서 잠도 잘 거라 믿었다. 아이보다 부부 중심으로 가족이 돌아가리라 예상했다. 애초에 헌신하는 엄마, 희생하는 엄마는 나의 캐릭터가 아니었으므로. 아이에게 절절매지 않으면서도 여유롭고 따뜻하게 키우고 싶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아이에게 헌신하고 희생하는 엄마도 아니었지만 나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챙기는 엄마도 아니었다. 집착하는 엄마도 아니었지만 느긋한 엄마도 아니었다. 그저 허덕이는 엄마였으며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판단조차 잘하지 못하는 엄마였다. 한마디로 이도 저도 아닌 그냥 엄마가 되었다.


10년 가까이 해 온 직장생활과 전문성 있던 나의 일은 무용지물이었다. 내가 맞닥뜨린 엄마 세계는 짐작과 달랐다. ‘낳으면 절로 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입히는 기초 돌봄 이외에도 많은 일을 해야 했다. 


좋은 식재료로 정성 깃든 가정식 요리를 해 주고, 영상 보여 주기로 시간 때우지 말고 오감놀이로 적절한 발달 자극을 주어야 했다. 낯가리고 소심한 아이가 되지 않도록 부지런히 데리고 다니기도 해야 했다. 아이가 떼쓰거나 투정 부릴 때도 화내지 않고 일관성 있는 훈육을 해 나갈 정도의 정신력도 유지해야 했다. 그 와중에 자식새끼에게 밀려 찬밥신세 되는 남편 기죽지 않게 적절한 관심과 칭찬도 쏟아내야 했다. 엄마 개인에게 부여된 첫 번째 과제는 뱃살 제거였다. 푸석한 맨 얼굴, 떡진 머리, 추리닝 차림의 아줌마여서는 안 되었기에 나갈 때 눈썹이라도 그려야 했다. 복직할 직장이 없더라도 집에만 있을 수 없으니 할 수 있는 일도 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돌봄과 가사 노동에 소질도 자질도 재미도 보람도 발견하지 못한 시간을 무작정 흘려보냈다. 정성스럽게 이유식을 해 주다가도 아이가 잘 먹지 않으니 지쳐 갔고, 육아서를 탐독하다가도 현실적용에서 난관에 부딪히며 책을 덮었다. 직장에 다니지도 않았으면서 아이와의 시간을 살뜰히 보내지도 못했다. 한때 나는 자신감 넘치고 매사 긍정적인 여성이었지만 육아와 살림 속에서 어느 것도 잘하지 못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엄마 세계의 루저가 된 기분이었다. 아이가 주는 찬란한 환희와 별도로 어느 날은 무료했고, 어느 날은 화가 잔뜩 나 있었고, 어느 날은 기진맥진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람이었던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는 물론,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하는지조차 고민하지 못했다. 가장 많이 한 고민은 오늘 반찬은 무얼 할지, 언제 아이가 잘지, 였다. 살아갈 땐 길지만 돌이키면 짧은 하루가 쌓여 갔고, 미래에 대한 암담함, 고립감이 뒤엉켰지만 어떻게 버텨 가야 할지 몰랐다. 아이의 말간 볼과 촉촉한 손바닥은 이제껏 느끼지 못한 기쁨을 주었으나 나는 자주 먼 곳을 바라봤다.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으나 아이가 자라는 속도를 내가 따라가지 못할까 봐 불안했다. 나에겐 방법도 언어도 없었다. 내가 내뱉는 말들은 아이와 주고받는 유아어이거나 언어가 될 수 없는 하소연이었다.


삼 년이 흐르고서야 흐릿하던 불편함이 조금씩 명확해졌다. 육아는 아이 돌보기가 아닌 ‘과업’이었다. 육아는 이 시대의 다른 영역처럼 ‘성과’로 측정되었고 나도 모르게 그 안에 놓여졌다. 그래서 다들 잘하는 거 같은데 나는 왜 못하는지 스스로를 들볶았다.


아이들이 제 각기이듯 엄마들도 모두 다르다는 걸, 그 당연함을 몰랐다. 엄마마다 처한 상황, 할 일의 양, 애씀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는 수월한 일이 누군가에겐 어려울 수 있음을 몰랐다. 


육아는 각자의 능력이나 마음가짐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이와 엄마의 기질, 신체 나이와 체력, 가족들의 협조, 주변 사람들의 성향, 경제적 상황, 거주지의 환경과 사회의 복지, 너무도 많은 조건이 작은 차이를 좌우한다.  온갖 상황들이 얽혀 하루하루의 육아가 만들어진다. 겉으론 비슷해 보이지만 저마다 놓인 각양각색의 상황을 직접 겪어 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나의 열패감은 여기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스스로 작은 차이를 무시하면서, 또는 나의 조건들이 무시당하면서, 누군가가 세운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가랑이가 찢어지면서.






나의 탈출구는 글쓰기였다. 속에서 들끓는 말들을 언어로 정리하지 않고선 한 발을 내디딜 수 없었다. 어떤 엄마가 되고 싶은지, 아이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좋은 엄마란 무엇인지,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할지가 아니라, 지금 내가 겪는 건 무엇인가를 썼다. 나에게 벌어지는 일을 기록했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충만함에서 가슴이 뻥 뚫린 공허감, 가슴 한편이 스산해지는 결핍감, 순식간에 달음질하는 격한 감정, 엄마도, 아내도, 여자도, 인간도 아닌 것 같이 몇 개의 자아로 분화되는 분열, 아이에게 소리친 후 겪는 자기혐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지만 누구라도 들어주기를 바라던 이야기를. 


실타래를 풀어갔다. 내 삶은 오롯이 나의 책임이겠지만 숱한 관계의 조합이었다. 아이, 남편, 엄마, 물건, 집, 사회적 환경 등이 얽히고설켜 나의 삶을 이루고 있음을 글을 쓰며 발견했다. 나를 방해하고 신경 쓰이게 하는 외부가 없고선 나 역시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한 줄, 한 줄, 쓰고 고치기를 반복하며 나에게 벌어진 변화를 해명해갔고, 나를 이루는 나 아닌 관계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하려 했다. 쓰는 만큼 나를 둘러싼 조건을 바꾸려고 몸을 움직였다. 


 나를 구하기 위해 써온 글은 이름 모를 독자들에게 닿았고, 읽고 공명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든든함이 다시 글을 쓰게 했다. 그리고 책까지 내게 되었다. 


첫 장 「육아의 기쁨과 슬픔」은 아이와 나의 관계이다. 나의 삶을 흔들어 놓은 작고 여린 생명체와 부대끼는 일상을 실었다. 두 번째 장 「가깝고 먼 가족」은 남편과 가사, 육아 분담을 하기 위한 혈투, 그리고 친정엄마에 대한 애증을 썼다. 세 번째 장, 「스타일 없는 라이프」는 주거와 물건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자리, 살갗에 날카롭게 와 닿는 물리적 배치를 바꾸지 않고서는 개인의 삶은 변하지 않았다. 네 번째 장, 「엄마지만 엄마가 아닌 채로」는 엄마가 되어버린 후 맞닥뜨린 내면의 혼란, 엄마로만 살고 싶지 않은 분투, 돌봄의 시간이 내게 준 의미를 담았다. 다섯 번째 장,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에서는 엄마이자 여성으로서 사회에 서 있는 지형을 그려본다. 내가 누구인지보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위치 파악을 하려 했다.






이렇게 쓰인 이 책에 육아 정보는 없다. 아이를 잘 키워낸 엄마도, 전문직 여성도 아니며, 뚜렷한 활동을 하지도 않고, 소속도 정체성도 없이 돌봄의 시간을 보내는 보낸 사람의 기록이다. ‘뭐 하는 누구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이름이 없는 내가 책을 써낼 자격이 있을까 많이 고민했다. 하지만 나처럼 성과, 성취, 지위, 내세울 직업과 인정이 없다 해도 그 시간의 가치를 살려내는 글,삶의 면면을 들추고 질문하고 헤아리며 자신을 일으키는 글이 많아지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용기 내어 책을 내놓는다. 


삶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속상하고, 행복하고 싶지만 잡다한 일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금세 지치고, 엄마됨과 육아를 위대한 일이라 찬양하는 목소리에 주눅이 든 누군가가 있다면 그곳에 닿길 바란다.


(엄마 되기의 민낯, 서문)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엄마 되기의 민낯 / 신나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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