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족>(2018)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를 차례대로 관람하면서 감독이 생각하는 ‘가족’의 의미를 깨달아간다. <걸어도 걸어도>(2009)에서 가족을 향한 감춰진 진심과 마음을 느꼈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에서 혈육과 양육의 경계 속에서 가족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느꼈다. 또, <아무도 모른다>(2005)를 통해 사회의 무관함 속에 나타나는 아이들의 미래를 체감했다. 그리고, <어느 가족>(2015)은 앞선 작품들뿐만 아니라 그동안 고레에다 히로카즈식 가족 영화 물음과 표현의 방점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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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타(죠 카이리)는 오사무(릴리 프랭키)에게 ‘스위미’ 내용을 설명한다. 그리고, 작은 고기가 모이면 큰 참치를 이긴다고 말한다. 이들의 관계는 마치 스위미 이야기 같다. 각자의 사정으로 뭉친 사람들이 사회라는 거대한 참치로부터 맞서기 위해 가족이라는 거짓 형태로 생활한다. 이들의 처지는 좋지 않다. 가족인 척하는 것일 뿐. 돈으로 이어진 가족이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처럼 이들은 점차 가족의 형태로 변모해 간다. 거대한 물고기로 착각하듯이 서로를 향한 연대와 책임이 점차 쌓여가며 가족처럼 느껴진다. 이들이 바닷가에서 노는 장면은 사회라는 큰 참치이자 파도 울림에 맞설 수 있는 스위미 같은 이들의 연대를 최대치로 끌어올려 준다.
쇼타(죠 카이리)는 마트에서 도둑질을 시도하는 린(사사키 미유)을 구하기 위해 마트를 엉망으로 만든 채 오렌지를 들고 마트에서 도망 나온다. 오렌지는 주로 희생과 변화를 상징하는 색이다. 쇼타가 도둑질하는 이유는 오사무(릴리 프랭키) 때문이다. 오사무는 쇼타를 아들처럼 대했다. 그가 아는 건 도둑질밖에 없었다. 그러나 쇼타는 도둑질을 재미로 삼지 않는다. 샴푸, 식품과 같은 생필품 위주로 도둑질했고, 자신도 가족인 척하는 사이에서 무언가 돕고 싶은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린도 마찬가지다.
쇼타(죠 카이리)가 경찰에 붙잡히면서 이들의 정체는 결국 탄로 난다. 가족이 아닌 이들이 경찰 조사를 받으며 가족의 정의와 의의를 생각하게 하는 장면은 백미(白眉)다. 이들은 결국 부모가 아니다. 아이가 엄마나 어머니라고 불렀냐는 경찰의 질문에 혈육과 양육의 부조화로 인한 가족의 정의가 흔들리며 노부요(안도 사쿠라)는 눈물을 참은 채 기억을 되뇌며 슬퍼한다. 아이들은 엄마라고 부르지도 않았고, 아줌마라고도 부르지도 않았다. 오사무(릴리 프랭키) 역시 마찬가지였다.
쇼타가 친부모님을 만나러 오사무와 함께 버스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촬영은 두 인물밖에 없는데도 와이드 샷으로 비춘다. 전날 밤 같이 눈사람을 만들던 좋은 사이가 눈 녹듯 사라지고, 한순간에 멀어져 버린 둘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다. 그리고, 매정하게 버스를 탄 쇼타와 버스를 쫓아가는 오사무. 둘 사이가 더 멀어질 때, 쇼타는 그제야 무음으로 ‘아버지’라고 부른다. 터놓지 못한 마음속 진심을 멀리 서야 힘겹게 부른다. 아버지가 되고 싶었던 오사무가 아버지를 포기하면서 비로소 아버지로 인정받는 모순이다.
그리고, 하츠에(키키 키린)가 죽기 전, 바다에서 노는 5명의 가족을 향해 ‘고마웠어’라고 무음으로 말한다. 이처럼 무음으로 전하는 마음의 메시지는 남과 가족을 향한 몸과 마음의 부조화 표현으로 보여준다. 소중하기에 더 섣불리 표현하지 못하는 모순을 <어느 가족>은 자연스럽게 표현한다.
노부요(안도 사쿠라)는 경찰 조사를 받으며 “누가 버린 걸 주웠을 뿐”이라고 말한다. 린(사사키 미유)은 가정 학대를 받는 아이였고, 쇼타(죠 카이리)는 파친코에서 주차된 차량에서 우연히 발견했었던 아이였다. 이들은 누군가로부터 피해를 당한 아이들이다. 그러나 단지 혈육이란 명목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이들은 돌아가도 과연 행복할까. 린은 친부모 곁으로 돌아갔지만, 부모로부터 관심받지 못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복도에서 구슬을 가지고 논 후 발코니에 몸을 기대 바라보는 쓸쓸한 눈빛은 다시 누군가가 자신을 줍길 바라는 처연한 눈빛을 보여준다. <어느 가족>에서 시바타 가족은 돈으로 끝내 이어질 수 없었지만, 시간으로 이들은 가족이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