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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롬 Apr 01. 2023

메마르고 불안정한 사랑과 붕괴

<헤어질 결심>(2022)

 박찬욱 감독 영화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 영화도 10개월을 넘어가고 있다. 지난날의 이 영화를 안 봤다는 나 자신에게 원망과 죄책감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지금이라도 본 게 어디냐는 다행과 안도감이 든다. 박찬욱 감독 필모그래피들 중 가장 최근에 본 <아가씨>와 비교했을 때, 이 영화는 상당히 애매모호하고, 영화에 등장하는 안개같이 흐릿하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 둘의 감정선 특히, 송서래(탕웨이)가 보여주는 감정은 만조 때 바다처럼 서서히 꾸준하게 들어와 시나브로로 마음을 적시게 만든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헤어질 결심> 스틸컷

 <헤어질 결심>에서 유독 눈에 띄었던 건 해준(박해일)이 통화할 때나 녹음을 들을 때 사용했던 에어팟이었다. 영화 전반적으로 현대적인 요소를 많이 대입했다. 중국인인 서래(탕웨이)와 해준(박해일)이 번역기를 사용하며 대화하는 장면, 스마트폰 시점으로 보여주는 등장인물의 촬영 구도, 영화에 중요하게 작용하는 녹음 파일이 들어간 핸드폰까지. 지금 현대 영화에서 오히려 사용하지 않으면 어색한 요소들이지만, 필자는 영화를 보면서 괜스레 어색하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색감 때문인 거 같다. <헤어질 결심>을 보면, 서래(탕웨이)의 진중한 중국어 독백 장면부터 붉은색과 청록색 계열의 의상, 서래(탕웨이)가 해준(박해일)을 숙면에 들기 위해 조명을 낮출 때 드러나는 배경색감까지 마치 <화양연화>와 같이 왕가위 감독의 홍콩 로맨스 영화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20세기말 로맨스와 21세기 로맨스가 머릿속에 겹쳐지니, 어쩔 수 없이 현대적인 요소가 툭 눈에 밟히게 된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의 소재를 스토리 전반적으로 사용해서 영화의 줄거리 흐름을 하나로 묶는 방법을 자주 이용한다. 가령, <올드보이>(2003)에서 등장하는 보라색 무늬와 OST가 있다. <헤어질 결심>도 바다 문양이 그 소재로 쓰인다. 서래(탕웨이)가 들고 다니는 노트 표지, 서래(탕웨이)네 거실 벽이 있고, 바다라는 소재도 영화 주요 배경이 바닷가가 있는 부산과 이포에서 벌어지니 영화 흐름을 일관되게 진행하는 장치이자 미학적인 역할로 작용한다.

 <헤어질 결심>은 2부로 나뉘어있다. 1부에서는 서래(탕웨이)의 남편 기도수(유승목)가 사망한 사건, 2부는 또 본의 아니게 서래(탕웨이)의 두 번째 남편 임호신(박용우)이 사망한 사건이 메인 플롯이라고 볼 수 있다. 1부는 해준(박해일)과 서래(탕웨이)가 서로 알아가는 장면이고, 오히려 해준의 시점에 가깝게 전개하므로 서래(탕웨이)의 감정이 해준(박해일) 보다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13개월 후 2부로 진행하는 플롯은 1부보다 조금 더 객관적인 시점에서 비치는데, 여기서 서래(탕웨이)의 감정이 명확히 드러난다. 


 해준(박해일)은 경찰이라는 직업정신이 투철하고, 그만큼 자부심을 갖는 인물이다. 하지만, 서래(탕웨이)에게 관심을 갖고 조금씩 관계를 발전하다가 용의자였던 그녀가 실제 범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범인을 잡는 경찰이 범인과 좋은 관계로 나아가려는 자신의 책망과 자부심이 붕괴된다. 그리고 그녀 곁을 떠난다. 하지만, 서래(탕웨이)는 그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영원히 자신을 기억하고 싶길 바랐다. 그래서 그녀는 일부러 마음에도 없던 임호신(박용우)과 함께 해준(박해일)이 이사 온 이포로 다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좁혀지 듯 좁혀지지 않고, 안개가 자주 생기는 이포처럼 이 둘 관계도 안개가 자욱하듯 뿌옇게 흘러간다. 서래(탕웨이)는 결국 1부에서 해준(박해일)이 헤어질 때 말한 대사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를 통해 그녀는 영원히 그가 자신을 기억하길 바라며 바다로 가서 자살해 버린다.              


 폰을 바다에 버리라는 대사를 왜 서래(탕웨이)는 폰을 버리지 않고, 자신이 자살을 했을까. 서래(탕웨이)는 해준(박해일)이 자신을 영원히 기억하길 바라서였을 것이다. 해준(박해일)은 미결 사건에 상당히 신경이 많다. 자신의 집 벽에 미결 사건 사진을 한가득 붙여놓고, 그 영향으로 밤에 숙면도 취하지 못해 불면증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에게 그녀가 하나의 미결 사건으로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다면, 그녀는 더없이 행복하기에 저 대사를 읊조릴 때 미소를 머금고, 자살을 선택한 게 아닐까. 서래(탕웨이)의 순정이 느껴지는 잔혹한 선택이자 불안정한 사랑과 죽음으로 마무리된 붕괴된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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