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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머리 제이슨 Feb 08. 2020

금요일 오후 어린이 관찰기

 결혼한 지는 7년 차가 되었지만 아직 아이는 없다. 낳아야 할지 아닐지는 고민 중이다. 그러다 보니 어린이들을 이해하는 능력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내 나이는 아이들과 점점 멀어지고 있고, 주변에 아이를 접할 기회는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애를 키우고 있는 친구들과는 라이프스타일이 달라지다 보니 교류하기도 쉽지 않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끔씩 어린이와 마주치면 굉장히 신기한 생명체를 만난 기분이 든다. 


 금요일 오후였다. 아내와 함께 아파트 단지에서 개를 산책하고 있을 때였다. 개가 앞장서서 가고 나는 개의 목줄을 잡고 따라가고 있었다. 아내는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는데, 갑자기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가던 길을 멈춰 섰다. 그리고는 말했다. "난 올리브영을 좀 들러야겠어." 여자들은 그런 때가 있는 것 같다. 문득 비장한 각오로 올리브영을 들를 결심이 서는 때 말이다. 


 그래서 개와 나는 산책을 멈추고 아파트 중앙공원의 벤치에 앉았다. 아내가 올영(올리브영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나 원 참)을 다녀올 때까지 기다리게 되었다. 그 시간의 아파트 중앙공원의 벤치는 정말 한가한 사람들만 모이게 되는 곳이다. 거기에는 세 명의 남자아이들이 있었다. 두 명은 원형 테이블에 놓인 의자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나머지 한 명은 키에 비해서는 커다란 어른용 자전거를 타고, 친구들이 앉아 있는 벤치 테이블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먹잇감을 노리며 선회비행을 하는 참수리 같았다. 


 재미난 광경이었다. 흐린 날씨에 꽤 쌀쌀한 날이었다. 날이 추워 손가락이 시리기 때문에 휴대폰을 꺼내기도 귀찮았던 터라,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관찰하기로 마음먹었다. 초등학교 4학년? 3학년? 혹은 덩치가 작은 5학년인가? 나이를 가늠하기 쉽지 않았다. 역시 어린이를 이해하는 능력이 사라지고 있었다. 3학년은 어느 정도로 큰지, 5학년은 어느 정도로 큰지, 그런 걸 분간하기 쉽지 않은 시기가 되었다. 개는 내 무릎 위에 얌전히 앉아 아내가 사라진 방향을 집요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요즘 아이들은 저렇게 노는구나 하는 걸 지켜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같이 앉아 있지만 각자의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서로를 보는 게 아니라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중간중간 옆에 앉은 친구에게 대화를 걸고 있었다. 얼굴을 보지 않을 뿐, 같은 놀이를 하지 않을 뿐, 그들은 소통하고 있었다. 자전거를 탄 친구는 게임 테이블에서 멀어졌다가 한 바퀴 돌고 다시 가까이 찾아왔다. 친구들에게 다가온 후 "게임 언제까지 할 거야 그만 좀 해"라고 외쳤다. 게임을 하던 한 명의 친구가 대답했다. "좀 있다." 눈은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잠깐 지루해져서 장갑을 벗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내에게 언제 오냐고 카톡을 보냈다. 그리고 주가를 확인했다. 오늘은 하락장이었다. 손이 차가워져서 다시 휴대폰을 넣고 장갑을 꼈다. 그때 친구를 개무시하던 게임소년 1이 스피커폰으로 엄마와 통화를 시작했다. 


 "엄마 나 친구들이랑 라면 먹어도 돼요?


 어린이는 게임을 하던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은 상태였다. 테이블 위에 또 다른 휴대폰이 있었다. 아마 그 휴대폰이 본인의 것이고, 자전거를 탄 친구의 휴대폰을 빌려서 게임을 하는 것이었다. 아아. 그래서 한 명의 어린이만 자전거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게임소년 1의 질문 뒤로, 스피커에서 엄마의 한숨을 들을 수 있었다. 익숙하고 진절머리 난다는 그런 한숨이었다. 


 "후우... 그래 알았어. 그런데 너 밖에서 먹겠다는 거야?"


 "네!" 


 어린이는 휴대폰에 눈이 고정된 채로 대답했다. 엄마의 짧은 물음이 이어졌다.


 "이 날씨에 밖에서 먹겠다고? 춥지 않아?"


 "아니요? 하나도 안 추워요!"


 어린이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되받아쳤다. 하나도 안 춥다고 이야기했지만, 휴대폰을 쥐고 있는 고사리손은 차가운 겨울바람에 벌겋게 굳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쓴웃음이 나왔다. 무릎에 있던 개가 나를 잠깐 쳐다보았다. 남자 새끼들 허세는 3학년이건 5학년이건 30 대건 50 대건 변하지 않는다. 너네 몇 학년이니 하고 물어볼까 하다가 그런 거나 묻는 나 자신이 싫어질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어찌 되었든 3학년에서 5학년 사이일 것이다. 놀고자 하는 정신력이 추위를 이길 수 있는 그런 나이인 것이다. 


 한 편, 아내는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게임을 하는 초등학생들처럼 집중력을 풀가동하고 있을 것이다. 올리브영은 그런 재미가 있다. 나는 중년을 바라보는 남자이기 때문에 그 정도는 아니지만, 올리브영만이 주는 재미는 어느 정도 수긍하고 있다. 콘돔과 멀티비타민(남성용) 말고는 아무것도 사본 기억이 없지만, 올리브영에 들어가면 최소한 10분은 구경하고 나오는 것 같다. 


 이윽고 자전거 소년이 다시 돌아왔다. 비장한 표정이었다. 올영에 가기로 결심한 아내가 짓던 그 표정이었다. 자전거 소년이 게임소년 1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챘다. "이제 끝이야. 나 학원 가야 돼." 사뭇 엄중한 톤으로 말했다. 게임소년 1은 사뭇 아쉬워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태연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게임소년 2는 제재를 당하지 않았음에도 신속하게 게임을 접고 함께 일어섰다. 세 명의 어린이들이 너무나도 쿨하게 태세 전환을 해서, 나는 약간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세 어린이는 각자의 학원 스케줄에 대해 잠깐 대화를 나누었다. 게임소년 1은 학원 스케줄이 없었지만 자전거 소년은 곧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게임소년 2는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세 명의 어린이들은 하나씩 자전거를 집어 타더니 아파트 단지 밖으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공원 벤치에는 나와 개만 남게 되었다. 아내는 여전히 올영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벤치에 앉아서 보냈던 카톡을 보니 아직도 확인 표시가 뜨지 않았다. 하늘은 여전히 구름이 많았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더 밝아진 것 같았다. 바람은 여전히 쌀쌀했다. 자전거와 함께 멀리 사라져 가는 어린이들을 보며 나는 한 가지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럼 라면은 같이 안 먹는 건가?"


 세 명의 어린이가 차가운 야외에서 라면을 먹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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