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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머리 제이슨 Jan 27. 2020

호텔 커피의 변심

 여행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황홀한 경험들 중에서 최고봉은 무엇일까? 내 경우에는 뭐니 뭐니 해도 우아한 호텔에서 조식 뷔페를 먹는 것이다. 조식 뷔페에 대한 나의 애정은 각별하다. 각별하다 못해 유별나서 아내는 나의 조식 뷔페 사랑을 진심으로 싫어한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행지에서 맞는 첫 기상을 위해 알람을 다섯 시 45분에 세팅하곤 한다. 그래야 적당히 잠을 깨고 조식 라운지가 여는 시간에 맞춰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욕을 하며 깨서는 나를 따라 아침을 먹으러 가곤 한다. 


 조식 라운지에 첫 번째로 들어갈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내가 이 호텔의 투숙객 중 가장 유별나고 식탐이 많고 부지런하다는 사실을 인증할 때의 쾌감이다. 요리가 종류별로 놓인 테이블 위에, 반짝반짝 빛나는 동그란 커버가 모두 닫힌 채로 얌전히 도열되어 있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에그 스크램블 뚜껑을 내가 제일 먼저 열 때의 뿌듯함 또한 말할 수가 없다. 


 부드러운 에그 스크램블과 바삭하게 구워진 베이컨, 해시 포테이토, 메이플 시럽을 가득 담근 팬케익과 와플... 심혈관에는 결코 좋지 않을 것 같은 서양식 아침식사를 산더미처럼 쌓아서 자리로 가져온 후, 음료수를 뜨러 간다. 일반 우유, 저지방 우유가 이름표를 달고 똑같은 유리병에 가득 담겨 있다. 예전에는 양심상 저지방 우유를 따르곤 했는데 생식 기능에 더 안 좋다는 루머를 어디서 주워들은 후부터는 일반 우유를 따라온다. 한 번에 유리컵을 두 개만 쥘 수 있기 때문에, 그 옆에 있는 오렌지주스와 사과주스 중 하나를 선택할 때는 항상 고민이 된다. 보통 사과주스를 먼저 가져온 후에 2차로 음료를 뜨러 갈 때 오렌지주스를 가져온다. 


 그렇게 적당히 테이블 위를 채우고 나면, 새하얀 앞치마를 두른 직원이 커피포트를 들고 와서 "Would you like some coffee?" 하고 묻곤 한다. 바로 이 타이밍이 조식 뷔페의 로망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낯선 여행지의 넓은 호텔에서, 대접받는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 이런 기분이 조식 뷔페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그러면 오랜만에 한 마디 영어로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Yes please." 그리고 택도 아닌 것에 괜히 우쭐한 기분이 든다(나만 그런가). 그리고 나면 하얗고 지름이 넓은 커피잔에 신속하면서도 느긋하게 따라지는 갈색의 커피를 잠깐 구경하게 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직원이 커피를 따라 주는 동안은 아내와 하던 대화를 멈추게 된다. 괜히 잠깐 숙연해진다고 할까?


 하지만 바야흐로 2020년이 되었고, 숫자가 바뀌면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특히 요즘 새로 지어진 호텔들 중에서는 이런 클래식한 대접을 과감히 생략한 곳도 있다. 조식 라운지에서 직원들이 따로 커피를 따라주지 않는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 대신 과감한 라운지 음악이랄까 아무튼 조금 더 힙한 음악을 틀어준다. 조명도 괜히 보라색이 섞여 있다. 무엇보다도, 유리 포트를 얹어 놓고 조금씩 데울 수 있는 커피가 아니라, 버튼을 누르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에스프레소가 촤르르 분사되는 머신들이 비치되어 있다. 직원들 입장에서도 훨씬 관리하기 편할 것이고, 호텔 입장에서도 직원들을 관리하기가 더 편할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감수성도 많이 단단해졌다. 굳이 누군가가 내 커피를 따라 주지 않더라도 쿨하게 커피를 가져다 마실 수 있다. 나 또한 그렇다. 커피 정도는 내가 직접 가져올 수 있다. 그렇지만 아쉬움 또한 남아있다. 누군가 커피를 따라 주는 것 때문은 아니다. 호텔 커피가 변심했다고 느끼는 것은... 다름 아닌 크레마 때문이다. 


 크레마는 뜨겁고 빠르게 커피를 추출했을 때 커피 위에 층을 이루는 부드러운 거품이다. 조지 클루니가 항상 모델로 나오는 네스프레소 광고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항상 검은색의 커피 위로 연한 갈색의 거품층을 클로즈업시켜 보여준다. 호텔 커피도 머신으로 바뀌면서 커피를 내려오면 거품이 생기게 되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거품이 정말 싫다. 아마도 나에게 호텔 커피에서 거품을 본다는 것이 시대가 변했음을 느끼게 해서가 아닐까? 더 이상 과도한 대접은 하지 않겠다는 효율 추구의 이면을 보는 듯하다. 


 가끔 옛날 호텔의 하얀 커피잔과 거품 없이 투명하게 담긴 커피가 아쉬워진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드립 커피 도구를 찾았다. 케멕스 드립 글라스와 주전자, 핸드밀과 원두를 샀다. 시간이 정말 정말 남아도는 아침이면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원두를 갈아 드립 커피를 내려 마신다. 거품 같은 건 없다. 흰 커피잔에 갈색 커피를 따라 놓으면 역시 멋스럽다는 생각을 한다. 


 시대의 변심 같은 건 잊어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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