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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머리 제이슨 Nov 22. 2019

탈모 광고 트로이카

 유감스럽게도...랄까 TV를 거의 보지 않는다. 패키지 할인의 저주로 인해 Olleh TV의 호구로 살아가고 있다. 1년에 다 합쳐서 10시간도 안 보는데 계속해서 돈만 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가끔은 TV를 켜곤 한다. 이번에는 공효진이 나오는 인기 있는 드라마 때문이었다. 


 본방을 보려고 TV를 틀었는데 광고가 나왔다. 정말 가끔씩 TV를 보기 때문에 오랜만에 키게 되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고를 보게 된다. 그런데 이 재미가 상당하다. 아주 가끔씩, 무언가 대수롭지 않은 행동을 했을 때 오는 희열감이 있다. 가령 딸기우유를 1년에 두 번 정도 마시면 정말 맛있다. 그런 것이다. 아주 가끔씩 TV를 틀어서 보는 광고의 맛도 비슷하다. 


 아무튼 그렇게 잠깐 광고를 보았다. 첫 번째 광고는 현빈이 모델로 나오는 탈모 샴푸 광고였다. 약간은 모발이 가늘어진 현빈이 여전히 근사한 수트발로 하얀 자켓을 입고 나왔다. 한 손에 새하얀 탈모 샴푸를 들고 새하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바람이 불며 현빈의 자켓이 멋있게 펄럭이고 있었다. 


 현빈의 광고가 끝나자, 공교롭게도 김광규가 나와 가발 선전을 하였다. 과학이 집대성된 하이엔드 가발, 바로 하이모의 광고였다. 광고의 초반부에선 김광규 님이 열심히 활약했지만, 역시 마지막 장면에선 하이모의 페르소나인 이덕화가 등장했다. 엄청난 카리스마를 뽐내며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완벽해 보이는 은발이 미세한 산들바람을 맞으며 견고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카메라가 반 바퀴 돌면서 소파에 앉은 이덕화 할아버지의 멋진 모습을 꼼꼼히 촬영해 주었다. 


 세 번째 광고는 새로 나온 그랜저의 광고였다. 무난하게 재밌고 무난하게 인상적인 광고였다. 


 네 번째 광고에서 또 탈모 샴푸가 나왔다. 이번에는 슈퍼주니어의 김희철이 화려한 보라색의 수트를 입고 나와 한 손에 샴푸를 들고 춤을 추었다. 뒤에는 수많은 엑스트라가 등장해 함께 율동을 따라 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스타일이었다. 


 네 편의 광고를 보고 나서 시간을 확인하였다. 10시가 조금 안된 시간이었다. 왜 이 시간대에 세 편이나 탈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것도 거의 연속으로 말이다. 한국 남자들의 모발이 이렇게 심각하게 가늘어졌단 말인가? 그냥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이제 예전처럼 TV광고의 위상이 높지 않아서 탈모 샴푸 같은 제품도 황금 시간대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일까? 


 좀 더 본격적으로 고민해 본다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사회현상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서구화된 식습관, 과도한 화학제품의 사용, 운동 부족 등등.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남자들 중 탈모 인구의 비중은 확실히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한다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이미 10년 전 20대 후반부터 탈모가 상당히 진행되었다. 해볼 건 다 해봤지만 돌이킬 수는 없는 수준이었다. 마지막으로 했던 시도는 압구정과 강남을 돌며 모발이식 병원의 견적 투어를 갔던 것이다. 병원 투어를 끝내고 나는 결심했다. 어느 겨울의 문턱에서 인터넷으로 전동이발기를 주문했다. 택배를 받은 다음 날, 머리를 박박 밀고 출근했다. 그 날 저녁에는 헬스장에 PT를 등록해 웨이트를 시작했다. 


 37세의 이른 나이로는 탈모 쪽으로 상당한 권위를 가진 입장에서 감히 말할 수 있다. 사나이라면 실낱같은 희망으로 탈모 샴푸를 쥐는 것보다 근육 빡빡이가 되는 쪽이 백만 배 더 낫다. 보장할 수 있다. 돈으로 뭔가를 소비해야 한다면, 내 약점을 보상하는 방향보다는 내 강점을 만들어 가는 쪽이 훨씬 바람직하다. 탈모의 절반은 거스를 수 없는 남성 호르몬 때문이다. 왜 그것을 활용하려 하지 않는가. 


 이런 이유로 나는 일련의 탈모 관련 광고들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약간은 거만한 표정으로 시청하였다. 그 거만함은 말하자면 그런 것이었다. 학창 시절에 중간고사가 끝나고 반 전체가 빠따를 맞은 적이 있었다. 앉은 순서대로 차례차례 앞으로 불려 나가 엎드려뻗쳐를 하고 빠따를 맞았다. 그날 제일 먼저 매를 맞고 자리로 돌아가는 1분단 첫째 줄 친구가 지은 표정에는 거만함이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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