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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머리 제이슨 Nov 19. 2019

안드레 아가씨 이야기

 컬럼비아 MBA에서 투자론을 가르치는 마이클 모부신이 쓴 '운과 실력의 성공 방정식'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는 스포츠별로 운과 실력의 상관관계를 매우 설득력 있게 구분해 놓았다. 종목별로 스코어가 만들어지는 특성에 다르기 때문에, 어떤 스포츠는 운이 상당히 많이 작용하고 어떤 스포츠는 운을 떠난 실력의 차이가 명확히 드러난다. 이 책에서는 운보다 실력이 많이 작용하는 대표적인 종목으로 테니스를 꼽고 있다. 


 정상급 선수들이 5세트 동안 타구를 주고받는 횟수는 600회를 넘어가기 때문에 각자의 실력이 뚜렷이 드러날 만큼 많은 확률 표본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야구의 경우는 타자들이 한 경기에 굉장히 소수의 기회를 갖고 타석에 들어서며, 투수가 던진 동그란 공을 동그랗고 얇은 배트로 쳐내야 한다. 거기에 미묘한 차이로 안타도 되고 파울도 되고 안타도 되기 때문에, 테니스에 비해서는 상당히 운이 많이 작용하는 스포츠인 것이다. 


 아무튼 다시 테니스 이야기로 넘어오자면,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테니스 선수는 '로저 패더러'이다. 그에 대해서는 큰 논란이 없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테니스 선수는 '안드레 애거시'이다. 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오랜 기간 동안 실력 발휘를 한 멋진 선수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안드레 애거시에 얽힌 유아 시절의 섬뜩한 추억 때문이다. 


 87년, 아니면 88년으로 기억한다. 나는 5세, 혹은 6세였을 것이다. 거실에 켜져 있던 TV에서 우연찮게 테니스 경기의 중계방송이 나왔다. 나는 화장실로 가다가 무심코 방송을 보게 되었다. 경기에 출전하는 두 선수의 이름이 제목으로 크게 표시되었는데, 한 선수의 이름이 '안드레 아가씨'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그리고 분명히 남자의 체격으로 보이는 수염이 거뭇거뭇한 선수가 긴 장발을 휘날리며 테니스 코트를 뛰어다니는 장면이 나왔다. 


 5세(혹은 6세)의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심각한 혼란이 오게 되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젠더 감수성이 관대한 편이 아니었다. 80년대의 유아였던 나는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표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휘날리는 긴 머리는 분명 여자의 헤어스타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머리가 긴 남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시커먼 수염과 단단한 골격은 분명 남자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름은 '안드레 아가씨'였다. 애거시도 아가시도 아니었다. 분명히 '아가씨'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그때 화면에서는 하얗고 짧은 반바지 아래로 시커먼 털이 수북한 안드레 애거시의 다리가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30년 전의 기억이 이렇게 선명하게 나는 것을 보면, 정말 큰 충격을 받았던 게 아닌가 싶다. 따지고 보면 영문 표기법이 어설펐던 당시 방송계의 상황 때문이다. 실제로 애거시라고 순화해서 표현하기 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의 이름 '아가씨'가 상당히 희한하고 우습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 사실을 안드레 애거시 본인도 알고 있다고 한다. 그가 방한했을 때 "한국에서는 젊은 여자를 '아가씨'라고 한다면서요?"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한 가지 후일담이 있다. 사실 안드레 애거시는 선수 데뷔 직후부터 탈모가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고,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긴 장발 가발을 쓰고 경기를 했다고 한다. 90년대에 프랑스 오픈에서 패배한 후 처음으로 자신의 대머리를 공개했다. 그 말은 그전까지 항상 가발을 쓰고 경기를 했다는 것인데, 당시의 시대상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힘들고 불편했을 것이다. 특히 스포츠 선수로서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고 그렇게 좋은 성적을 냈다는 게 짠하기까지 하다. 


 대머리를 공개한 90년대 이후부터 안드레 애거시는 나이키에서 만든 두건을 쓰고 경기에 나왔다. 이마 가운데에 나이키 로고가 멋스럽게 박혀 있었다. 13세 정도 되었던 나의 눈에도 안드레 애거시의 그 모습이 더 당당하고 멋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보다 몇 년 이후부터는 아예 두건도 벗고 민머리로 경기에 나왔다. 그즈음에는 나이도 꽤 들었기 때문에 전성기의 기량도 아니었고, 더 이상 패션 아이콘도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던 것으로 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액션스타들 중에는 민머리가 상당히 많다. 2019년 현재 헐리우드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스타는 (더 락) 드웨인 존슨이다. 엄청난 근육질의 거구와 반짝반짝한 민머리가 트레이드마크이다. 제이슨 스테텀, 빈 디젤 등등 다른 인기 배우들도 있다. 더 남자다운 모습을 강조하는 방법으로 반짝이고 동그란 두개골을 한껏 자랑하고 있다. 세상이 바뀌고 트렌드가 바뀌다 보면 인식도 바뀌게 마련이다. 

 

 이래저래 안드레 애거시에게 애틋한 마음이 든다. 물론 내가 연민할 처지는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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