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지 12년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여전히. 도무지. ‘명절’에 해야 하는 일들이 납득되지 않는다. 왜 남인 내가 그 낯선 곳에서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시가 조상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지 정작 그들의 진짜 가족은 뒷전으로 빠져있는데 말이다.
결혼식 날 울먹이는 부모님에게 남편의 아버지는 이제 OO 이는 내 딸이라고 말했었다. 눈치 없는 그 발언에 난 아직도 가슴속에 분노를 품고 있는데 정작 12년의 세월 동안 남편의 부모는 날 가족으로 대한적이 없다. 그들의 진심이 조금이라도 느껴졌다면 내가 시가에서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이토록 싫지는 않았을 것이다.
명절 음식 장만 후에 그 많은 음식을 놔두고 집 근처 1,500원짜리 김밥을 사 오라고 했던 분들이다. 이상하리만치 우리에게 단돈 1,000원도 쓰기 싫어했고 모든 행사 식사비용은 당연히 우리 몫이었다. 모시고 갔던 식당에서는 언제나 음식 맛을 혹평했으며 혹평을 했으나 우리 몫까지 다 먹어 치웠다.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결혼하는 것이 목표였고 우리는 양가에 금전적 도움 없이 지금껏 잘 살고 있다. 하지만 남편의 부모는 우리를 돈 줄 취급했다. 본인이 생각한 용돈보다 적은 액수를 받으면 술에 취해 전화해서 욕을 하기도 했으며 매달 적금 100만 원을 넣을 여유가 있음에도 한 달 생활비를 요구했다. 오래된 차를 소형차로 바꿔드렸으나 벤츠를 타고 싶었다고 투덜거렸고 우리가 필요할 때는 새벽이고 밤이고 상관없이 전화를 해대고 중병이 아님에도 언제나 아기처럼 울며불며 연락해서 우리가 병원에 모셔다 드려야 했으며 회사 앞에 연락도 없이 찾아와 밥을 먹자고 하거나 친정 부모님 일하시는 곳에 불쑥 찾아가 엄마 아빠를 곤란하게 한 적도 있다.
그들은 나와 남편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가를 챙기는 이유는 내 남편이 자신의 부모가 보통의 부모가 아님을 인지하고 그들의 무례한 행동을 비난해주고 있기 때문이며(그럼에도 그들 행동의 변화는 없고 결국 남편도 팔은 안으로 굽게 마련이지만) 그런 남편의 의사를 존중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남편의 동생이 인천에서 내려왔다. 이번 추석은 아무래도 코로나 때문에 내려올 수 없을 것 같아 혼자 온 모양으로 그는 점심쯤 도착해서 식사를 하고 소파에 단 1초도 앉아있지 않고 다시 인천으로 출발했다. 몇 주 전 고관절 수술을 했던 시아버지가 병원에서 진상을 부려 쫓겨나다시피 퇴원을 했던 고생 담을 전했으나 그는 ‘아버지는 원래 그렇잖아’라고 남 이야기하듯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태풍이 몰아치던 아침 병원을 가겠다고 또 새벽부터 전화 왔던 시아버지와 나몰라라 하는 시어머니. 결국 남편이 병원을 모셔다 드리며 한동안 맘고생을 했던 것을 지켜본 나로선 그의 무심한 태도가 몹시 거슬렸다.
우리에겐 단돈 1,000원도 쓰기 싫어하는 시아버지가 그의 가족에겐 몇 천씩 지원해줬음에도 그는 아버지를 남 보듯 했다. 본인 맘의 짐을 조금이라도 가지기 싫어서 의무적으로 왔다 가는 그에게 장단을 맞춰준 나는 너무 화가 났다.
그 와중에 시어머니는 남편에게 시험관 시술을 받아 보는 것이 어떻겠냐며 본인들은 우리가 있어서 괜찮은데 너희의 노후는 누가 책임질 거냐고 했다. 그들은 역시 우리를 노후를 책임져 줄 인력으로 생각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다음 날 분한 맘을 삭히지 못하고 대학동창들 방에서 한바탕 시가 욕을 했는데 동창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뒤에서 열 받는다고 하지도 않고 하고 싶은 말은 앞에서 다 한다’고 그리고 다른 친구는 그럴 때는 웃으면서 따박따박 ‘호호호 저는 제 자식한테 짐 되기 싫은데요 호호’라고 말했어야 했다고
머리를 한방 맞은 기분이었다. 난 왜 저런 말로 못 받아쳤을까. 왜 멍청하게 앞에서 말 못 하고 뒤에서 욕하는 한심한 인간이 돼버린 걸까.
평소 몇 억씩 대출을 받아 같이 빌딩을 사자는 류의 말도 안 되는 제안들은 단호하게 거절하곤 했지만 내 감정을 거슬리게 하는 대화에는 적극적으로 내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 이유가 가장 컸고 그런 말은 무시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는데 정작 그들은 날 무시해도 난 그들의 말이 뇌리 속에 남아 몇 날 며칠을 분노의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분노는 12년간 차곡차곡 쌓였고 내가 그들의 유전자를 나눠가진 자식을 낳지 않았다는 사실이 천만다행으로 느껴졌다.
아이를 낳지 않아서 시가에 죄책감을 가진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다. 그것이 내 약점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으면서도 마치 약점 잡힌 사람처럼 그들 앞에서 방관했던 나의 행동들은 옳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 시가는 언제나 내가 잘해야 하는 곳이라는 몹쓸 고정관념이 자리 잡고 있었나 보다. 하지만 이것으로 나를 탓하는 것은 싫다. 다만 내가 나 자신을 귀히 여기지 못했다는 것은 후회가 된다.
남편이 소중한 것과 남편의 부모가 내게 무례한 것은 별개의 문제인데 나는 그것을 분리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남편보다 소중한 건 나 자신이기에 더 이상 뒤에서 욕하는 사람은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