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치기 해변
제주 5일 차. 어제 탄 자전거의 여파로 온몸이 쑤시듯 아프다. 느지막이 일어나 숙소 근처의 마을을 어슬렁거리다 해장국을 먹었다. 항상 구체적으로 먹고 싶은 것이 있는데 여행하는 동안 먹고 싶은 음식이 없었다. 이것이 이토록 괴로운지 몰랐다. 처음으로 먹으면 배부른 알약의 필요성을 느꼈다.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스타벅스에 갔다. 제주에만 있는 메뉴 ‘제주 까망 크림 프라푸치노’를 시켜보았다. 음, 이런 맛이구나. 노트북으로 여행기를 쓴다. 내 옆의 빈자리에 아기, 아기 엄마, 아기 엄마의 친구가 자리 잡았다.
나는 아기를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어딜 가도 내 주위에 아기들이 오게 된다. 제주를 올 때 탔던 비행기 뒷자리에도 아기가 있었고 아마 제주를 떠날 때 타는 비행기 뒷자리에도 아기가 있을 것이다.(*실제로 아기가 있었다)
아기 엄마는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아기에게 이모(=나)를 방해하면 안 된다고 미리 경고한다. 덕분에 아기가 돌고래 소리를 내어도 신경이 거슬리지 않는다. 아기 엄마는 본인의 인생이 아이로 인해 완전히 바뀌어버릴 것을 짐작했지만 그의 남편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들은 정작 서로 하고 싶었던 대화는 하지 못하고 겉돌았다. 아기를 어르고 달래고 저녁은 무엇을 먹고 숙소는 어디로 정할 것인지에 한참 이야기하다 자리를 떴다. 그들을 보며 비로소 혼자 여행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생각했다.
혼자 여행의 장점은 누군가와 대화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모든 일정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 단점은 누군가와 대화할 수 없다는 것과 모든 일정을 내가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주의 날씨는 정말로 변화무쌍했다. 흐리다가 햇빛이 비치고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분다. 그러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파란 하늘이 빼꼼 내비친다. 나 같네. 나는 비가 멈추었을 때 밖을 나갔다. 그리고 광치기 해변을 걸었다.
세화, 월정리 해변이 예뻤다면 광치기 해변은 아름다웠다. 이곳이 제주 4.3 학살지라는 것을 몰랐다. 내가 걷고 있던 모래사장 아래에는 시신들이 묻혀있었고 바다로 시신들이 떠밀려 나갔다. 잠깐이라도 그들을 생각하며 걸었다. 추모비에 고개를 숙이고 평안하시라 기도했다.
이런 곳이 일출을 보는 명소가 되었다. 나 또한 이 해변을 아름답다 생각하며 걸었다. 누군가의 죽음보다 당장 내 안의 기쁨과 슬픔이 더 중요한 것이 인간이다.
또다시 부는 세찬 바람에 우산이 뒤집어져서 산책을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하나로 마트에 들러 고등어회 한 접시와 노지 귤을 샀다. 여행 온 내내 엄마에게 아침, 저녁으로 ‘나는 살아있어요’ 카톡을 보내고 있다. 나는 고등어회를 자랑할 요량으로 사진을 보냈는데 엄마는 숙소에서 혼. 자. 그것을 먹고 있는 것에 포인트를 맞췄다. 순식간에 고등어회가 초라해 보인다. 또 한바탕 엄마를 위로한다.
이혼하는 건 난데, 매번 엄마를 위로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면 그동안의 고마움이 눈 녹듯 사라져 버리고 만다. 나는 엄마가 좀 더 강해졌으면 좋겠다. 아마 친구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