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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Mar 16. 2023

무용한 것의 즐거움

어쩌면 유용한 것의 즐거움

불필요한 것들을 생산하지 않겠다는 마음은 보란 듯이 뒤집혔다. 나는 밤낮으로 무용한 것을 만드는 일에 매진했다. 온종일 손을 놀리다 보면 어느새 주위는 어둑해져 있었고 그제야 밥을 먹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콘센트 덮개
용도가 없는 주머니들
붙박이장 통풍구 덮개


에구구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에 몸을 누이며 내일은 절대 손을 놀리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지만, 눈을 번쩍 뜨면 뜨개실부터 집어 들었다. 나는 알았다. 저 뜨개실이 다 없어져야 내가 뜨개질을 멈추겠구나.      

심지어 나는 뜨개실이 다 떨어질 것을 대비하여 옷을 만들 계획까지 짜고 있었다. 집에 남아도는 원단 또한 천지라 마찬가지로 원단을 다 쓸 때까지 옷을 만들까 봐 나는 내게 좀 질렸다.   

  

뜨개질이 질린다 싶으면 재봉틀을 잡았다. 제일 먼저 앞치마를 만들었다. 앞치마라는 것은 생각보다 비싸다. 지금 쓰고 있는 앞치마도 만든 것인데 앞치마에 놓인 자수를 보면 그것을 한 땀 한 땀 수 놓았을 심정이 다시 나를 콕콕 찌른다.      



입으면 겁나 화려해지는 앞치마
퀼트 스타일 에코백
자수 에코백


앞치마를 완성하고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곧바로 에코백을 만들 생각을 한다. 몸이 머리보다 빠른 유일한 순간은 무언가를 만들 때이다. 내가 가진 에코백 역시 모두 만든 것인데 이번엔 처음으로 퀼트 스타일로 만들었다. 각 떨어지는 사각형의 무더기들을 보고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확실히 나는 즐겁다.     


자수 놓았던 천 조각을 이용해서 에코백 하나를 더 만들고 나서 이젠 옷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학교 과제로 만들 땐 그렇게 괴로웠던 것을 스스로 하겠다는 내가 놀랍다.      


우선 원단을 세탁해서 수축률을 잡고 다림질로 주름을 없앤 뒤 집에 있는 옷을 참고해서 패턴을 그렸다. 재단 시 움직임을 방지하기 위해서 시침핀을 꽂아 재단했다. 봉제 전 작업은 성질 급한 내게는 고역이었는데 이젠 즐겁다.     



누가 봐도 내 것 같은 슬리브리스
누가 봐도 내 것 같지 않은 슬리브리스
투피스의 완성된 상의


누가 봐도 내 것 같은 슬리브리스를 만들었다. 다음날에는 누가 봐도 내 것 같지 않은 슬리브리스를 하나 더 만들었고 청춘의 덫(최근에 청춘의 덫을 즐겨본다)에 나온 심은하 오피스룩에 꽂혀서 투피스 만들기에 도전했다가 상의 하나만 만들고 나의 만들기 행진은 드디어 멈췄다.    

  

내가 만들어낸 무용하고도 무용하지 않은 것들은 대체로 이런 것이었고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을 때 나는 보통 만들기를 멈췄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이런 잡다한 취미가 있는 내가 좋았다. 생각해 보니 나는 유용한 것들을 만들고 있었다. 거실의 커튼까지 만드는 사람이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만들 때 즐거웠다는 것, 그것이 가장 유용한 것이었다. 이제야 그 사실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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