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를 다 한 것들
젖은 머리를 말릴 때마다 겁이 났다. 오래된 드라이어는 무언가를 태우는 냄새를 내뿜고 아주 가끔은 불꽃이 튀기도 했다. 전자제품에 관심이 없어서 아직도 아이폰 8을 쓰는 내가 유일하게 교체한 것은 전자레인지 정도인데 아무래도 이번엔 새 드라이어가 필요한 것 같다.
온몸으로 찬 바람을 맞아가며 선풍기로 머리를 말렸다. 나는 드라이어 사는 일을 미루고 있었다. 더 이상 선풍기의 차가움을 견딜 수 없게 되자 여행지의 숙소에서 엄청난 풍력을 선보였던 드라이어의 브랜드를 기억해 냈고 예전처럼 며칠을 서칭 하는 열정 없이 그 브랜드의 베스트셀러 제품을 구매했다.
새 드라이어는 기대만큼 풍력이 세진 않았지만 가벼웠다. 쓸모를 다한 진분홍색 드라이와 비교한다면 심미적으로도 우수하다. 하지만 나는 예전의 묵직함을 조금 그리워하면서 머리를 말렸다.
드라이어가 도착하고 며칠이 지나서야 오래된 드라이어를 소형 가전제품 수거하는 곳에 버렸다. 밖에서 본 드라이어의 상태는 생각보다 처참했다. 여기저기 부서지고 손잡이에는 각종 때가 시커멓고 끈적하게 들러붙어있었다. 옆에는 누군가가 버린 전기 포트가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뚜껑이 열린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드라이어보다 더 처참해 보였다.
기능을 다 할 때까지 쓰다 버려진 것의 모습은 이런 걸까. 쓰지 않는 물건을 버리는 건 아무렇지 않지만, 쓸모를 다 하고 수명이 끊긴 물건을 내다 버리는 일은 사람을 찡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땅에라도 묻어줘야 하나.
잎끝이 자주 마르고 벌레가 꼬이던 식물들을 보며 차라리 죽어줬으면 하는 생각을 서슴없이 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차례로 말라죽었다. 식물을 키우면서 알게 된 사실은 식물도 인간처럼 자신이 사랑받는지 사랑받지 못하는지 기가 막히게 안다는 것이다.
어쩌면 생명이 없는 물건 또한 그렇지 않을까. 자신의 쓸모를 아는 물건은 최선을 다해 오래 버텨줬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것들을 귀히 여긴다. 그래서 자주 입지 않은 비싼 트위드 재킷은 아무렇지 않게 버려도 하도 입어서 여기저기 터진 꽃무늬 홈 원피스들은 버리지 못한다.
자신을 물건 버리기의 달인이라 칭하면서도 사진만은 버리지 못했던 나는 몇 개월 전에 이제는 만나지 않을 이들이 담긴 사진을 전부 버렸었다. 다이어트 시작 전에 사두었던 고칼로리 음식들을 음식물 분리수거함에 쏟아붓는 심정으로. 버리지 않으면 언젠가 모조리 먹어치울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드라이어를 버리고 나서야 그의 수고가 생생하게 드러났듯이 사진을 버리고 몇 개월이 지난 지금에야 인연이 쓸모를 다했기 때문에, 관계의 수명이 끝났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담담히 버릴 수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렇게 일단 해봐야 아는 것들이 있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