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혼자 살고 술은 끊었어요
랜선 집들이
오랜만에 만난 회사 동기들이 보드라워진 나의 손을 보고 놀라워했는데 리모델링과 입주 청소를 하는 동안에 손은 보란 듯이 금세 거칠어졌다. 숨길 수 없는 것엔 가난과 사랑뿐만 아니라 노동하는 손도 있다.
7월 15일에 시작된 새 단장이 드디어 마무리되었다. 처음으로 전동 드릴을 써보았고 조명을 달았고 도어록과 방문 손잡이, 경첩을 교체해 보았으며 무엇보다 태어나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되었다. 신기하지. 전에는 혼자 살지 않아도 혼자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정작 혼자 살게 되자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게. 상상이란 건 맞아떨어질 때도 많지만 실제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되기도 한다.
두 달 동안 리모델링 관련 글만 올리며 본의 아니게 모두를 기대케 했지만, 기대를 충족시킬 만한 드라마틱한 것은 없고 대부분 평범하다. 빠듯한 예산 때문에 뜯어고치지 않으면 미치고 팔짝 뛸 것들만 손봐서.
제일 신경을 많이 쓴 공간은 주방. 그동안의 생활 패턴을 봤을 때 거실보다는 주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많았다. 주방이 가장 아름다웠으면 했고 전의 집과는 완전히 달랐으면 했다. 그래서 고른 것이 푸른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타일이었다.
쉽게 바꿀 수 없는 자재에 화이트가 아닌 컬러를 쓰는 건 금세 질리거나 촌스러워질 수 있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타일을 쓰고 싶었다. 요즘엔 컬러 타일을 쓰지 않는다는 말을 흘려들으며 우리 집 자재 중에서 제일 비싼 이태리 출신으로 시공했는데 결과적으로 매우 만족한다.
1인용 식탁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익숙한 빌딩 숲, 산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에 창밖을 내려다보며 첨벙첨벙 튀어 오르는 숭어들과 그들을 노리는 왜가리를 구경하고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와 농구를 하는 어린이들도 구경한다.
주방 선반에는 지난 20년이 담겨있다. 엄마가 준 빈티지 커피잔과 유리그릇, 혼수로 샀던 식기와 심지어 몰디브로 신혼여행 갔을 때 샀던 우드 보울도 있다. 애써 모든 추억을 배제하고 없애버리고 싶진 않았다.
침실은 오로지 잠만 자는 곳이라 화장실 딸린 넓은 안방을 드레스 룸으로 쓰고 그다음으로 넓은 방을 침실로 가장 작은 방은 서재로 사용한다. 창밖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내 친구 상어를(그렇다. 이제 내 친구가 되었다.) 껴안고 잠이 든다. 이사하면서 몬스테라 이파리가 많이 상해서 앙상해졌지만 곧 새 이파리를 내놓겠지.
욕실 1 BEFORE
화이트 타일로 골랐으나 조명을 받으면 그레이가 되는 타일이 깔린 문제의 욕실. 욕실은 최대한 심플했으면 했다. 그래서 바닥과 벽을 동일한 타일을 쓰고 수납장도 없앴다. 멋과 끼를 배제한 공중 화장실 같은 느낌으로.
욕실 2 BEFORE
그래도 드레스 룸에 딸린 욕실에는 선반도 달고 세면기가 바닥에 배수관이 있어서 이케아에서 장난감 같은 수납장 하나도 들여놓았다. 여기에 청소 솔과 세제를 보관하는데 엄청 편하다. 보통 샤워 수전은 위에 달지만, 아래에 달았다. 시공자가 너무나 의아해해서 앉아서 샤워를 한다는 지극히 사적인 정보를 말해 주었다. (이왕 말한 김에) 서서 씻으면 뭔가 불안하다고나 할까. 꼼꼼하게 씻을 여유가 사라진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앉아서 씻는데(우리 많이 친해졌군요) 물도 사방팔방 안 튀고 암튼 좋다는 그런 이야기.
거실을 자주 사용하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거실 인테리어가 가장 난감하다. 테이블만 놓으려다가 본디 거실은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는 맛이 있어야 해서 중소기업 사장님이 쓸법한 가죽 소파를 구매했다.
소파는 무조건 폭닥한 패브릭을 고집했지만, 이번에는 정체성이 드러나지 않는 디자인의 소파가 갖고 싶었다. 여기에 누가 사는지 모를 것 같은 소파 말이다. 고르고 골라서 내 인생 최대로 비싼 소파를 부들부들 떨면서 결재했다.
엄마가 탐탁해하지 않는 거실 조명도 아빠가 달아주셨다. 정 가운데에 달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는 노년의 아빠를 보는 심정이란. 기뻤다. 아직 아빠가 조명을 설치할 수 있는 힘이 있어서. 그리고 미안했다. 그 마음을 들키기 싫어 아빠를 써먹을 수 있을 때까지 많이 써먹어야겠다고 어이없는 소리를 내뱉었지만.
집 안 곳곳에 아빠가 ‘인순아(기분이 좋거나 놀리고 싶을 때마다 엄마 이름을 부른다.) 그거 좀 들고 와봐라’ 외쳐대며 달아놓은 조명이 달려 있다. 자세히 뜯어보면 들떠있고 뭔가 어설프지만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둘 것이다.
상처투성이에 변색된 마룻바닥을 반질반질하게 닦고 살 것이다. 이 더위에도 공원에서 테니스 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에너지를 쏙쏙 빨아먹고 살 것이다. 아빠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달아둔 조명을 보고 웃으면서. 내 취향과는 전혀 맞지 않은 폭신한 실내화를 신을 때마다 포근한 엄마를 생각하며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