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지금, 여기

아직도 집은 완성되지 않았다.

by 윤비

무릎, 팔꿈치, 손목, 손가락 관절이 욱신거려서 으어어어 신음을 내뱉으면서 아침을 맞이한다. 이 애들은 밤에는 기특하게도 괜찮은 척해주다가 아침 6시 무렵부터 날 쑤셔댄다.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하는 동안에 몸에 관절이 얼마나 많은지를 매번 확인하는 요즘이다.

이번 주부터 다시 오트밀빵을 만들어 먹고 있다. 그동안 단 밀가루 빵에 익숙해 있던 혓바닥이 오트밀빵을 조금 서먹하게 대했지만, 며칠 지나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맛있어하고 있다.


아침 9시부터 일을 시작한다. 물론, 돈벌이는 아니고 페인트 작업을 시작한다는 말이다. 바닥에 페인트가 튀는 걸 방지하려고 보양을 해놓았지만, 페인트는 언제나 보양하지 않는 바닥에 기가 막히게 우수수 떨어진다.

문득, 이 일이 끝나고 나면 앞으로 뭘 해야 하나 싶었다.(물론, 돈벌이를 알아봐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게 입주 청소를 일주일 만에 끝낸 사람이 갑자기 느긋한 마음을 갖기로 다짐하게 된 것이다.

몇 달째 정신이 없었다. 집을 알아보고 매매하고 이혼하고 이사하고 리모델링하고 입주 청소를 하는 동안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선택과 결정을 했고 난생처음 혼자서 해 보는 일이 많아서 어리둥절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게 쫓기는 것 같았다. 온종일 일을 하고 밤이 되면 필요한 것들을 얼렁뚱땅 급하게 샀다. 그렇게 산 것은 브래킷이 천장에 뚫린 구멍보다 작아서 설치할 수 없는 조명이나 흡입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무선 청소기 같은 것들이었다.


평소 같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하지만 지난 2년 동안의 경험이 내게 재빠르게 결정하고 행동하라는 지령을 내린 것이다. 신속하게 결정할 것과 신중하게 결정할 것이 있기 마련인데 뭐든지 신속하게 결정하고 결론짓고 싶었던 것 같다.


올해 안에는 뭐든 돈벌이를 할 생각이지만 불현듯 쫓기는 기분으로 엉뚱한 결정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주어진 이 평온을 조금 더 누리고 싶은 마음도 크다.


이제는 해운대가 아니라 20대에 친구들과 자주 만나던 대학가 근처에서 지하철을 탄다. 익숙하지만 낯설어진 거리를 보며 마치 시간 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떤 선택을 되돌릴 수 있을까 같은 상상은 많이 했지만, 그때 나의 기분이 어떨지는 상상해 보지 않았다. 20년 치의 경험을 안고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는 건 어쩌면 굉장히 고독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지 못하는 세상에 사는 건 천만다행인 일이 아닐까. 우리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불안해하지만 말이다.


입주 청소를 끝난 뒤에 부모님과 언니가 집을 다녀갔다. 내게 새로운 시작을 무조건 응원해 주는 가족과 친구가 있고 혐오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사람이 내는 소음을 듣지 않아도 되고 맘 편하게 잠들 수 있다는 지금의 현실이 벅찼다.


그래서 아직도 집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다. 페인트칠은 2번에서 3번 칠하는 것으로 변경되었고 방문 손잡이 규격이 안 맞아서 캐치 박스 부위를 좀 갈아내야 하고 경첩도 바꿔 달아야 하고 길이가 맞지 않은 커튼도 뜯어서 길이를 연장해야 하고 천장 구멍에 맞지 않은 조명을 다시 찾고 오작동되는 현관 센서 조명도 손봐야 한다.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것 같지만, 랜선 집들이는 좀 더 기다리셔야 될 것 같다고 알려드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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