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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Jul 03. 2024

이사했습니다.

밤을 꼴딱 새웠다.

 반포장 이사를 계약해서 거의 모든 짐을 직접 포장했는데 이삿짐 아저씨가 해외 이사 가는 것처럼 포장을 해놨다고 감탄해 주었다. 흘러가는 농담도 허투루 놓치지 않고 어떻게든 인정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걸 보니 3년 동안 놈팡이로 살아온 것이 실감 났다.  

    

깨끗하다고 생각했던 집은 짐이 하나, 둘씩 빠질 때마다 먼지 쌓인 속내를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청소기를 돌렸다. 처음 이 집으로 이사 왔을 때의 모습이 보였다. 방마다 돌아다니며 그동안 고마웠다고 널 많이 좋아했다고 말해주고 집을 나섰다.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이사 온 집에 짐을 다 내리고 나서야 큰 수납장 하나와 그 안의 짐들을 그대로 두고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다시 퇴근길 정체되는 차들 사이를 요리조리 조바심을 내며 운전했고 퇴근한 전남편과 마주치지 않을까 불안해하며 수납장 안의 짐들만 챙겨 재빨리 집을 빠져나왔다.     


요즘 하는 일들의 대부분이 이렇다. 기껏 해놓고선 어이없는 실수를 꼭 한다. 예를 들면 ‘램라이스랩’이 먹고 싶어서 간 음식점에서 당당하게 ‘치킨라이스랩’을 달라고 하는 식이다. 아무래도 정신줄 한가닥이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모양이다.      


관리사무소에 들러 차량을 등록하고 공동 현관문 지문등록을 했다. 1인 가구는 긴급 연락처를 별도로 기재하는 모양인데, 관리사무소 직원들이 ‘젊은 사람은 안 해도 된다’ 고 속닥거리는 소리를 듣고 또 부리나케 젊. 은. 에 방점을 찍고 흐뭇해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온종일 밥을 굶어서 엄마가 끓인 소고기뭇국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땀과 먼지로 뒤덮인 몸을 씻어내고 언니의 물건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창고 같은 방 안의 침대에 누웠다. 리모델링이 진행되는 동안에 머물 부모님의 집, 20살부터 28살 때까지 살았던 내 방.      


상상 속에서 수없이 나를 찔러댔던 사업에서 실패하고 낙향한 것 같은 패배감은 느껴지지 않았고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듯한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안녕을 고하고 떠나온 곳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살았던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낯설어졌고 긴 여행에서 돌아와 마주한 집도 낯설기는 매한가지였다. 내가 살 곳은 따로 있었고 그곳으로 가고 싶었다.      


20대의 나처럼 컴컴한 방구석에서 애청했던 라디오프로그램의 마지막 방송을 들으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연을 보냈고 무려 1분 동안 토시하나 빠지지 않고 사연이 읽히는 행운이 찾아왔다.      


놀라움, 기쁨, 흥분, 설렘, 낯섦, 아쉬움, 슬픔, 두려움이 한데 뒤엉켜 쉬이 잠들지 못했다. 엉킨 실타래를 풀어내듯 차근히 감정을 정리할 시간은 어이없게도 사정없이 덤벼드는 모기들 때문에 얼렁뚱땅 넘어갔다. 모기 5마리를 압사시키고 나니 어느새 새벽 5시. 밤을 꼴딱 새웠다.      


끝이 정말로 끝났고 시작이 정말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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