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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파두부와 호랑이 슬리퍼

6월, 아직 올해는 끝나지 않았다.

by 윤비

한 냄비 가득 마파두부를 만들었다. 밥 차라는 시간을 줄여서 공부에 매진하겠다는 심산이었다. 마파두부 3 일차. 상온에 하루 방치된 나의 맛없는 마파두부가 폭삭 쉬었다. 냄비 뚜껑을 재빨리 닫고 두유나 마실 요량으로 두유를 컵에 따랐으나 두유는 요거트가 되어 뭉텅 컵에 쏟아졌다. 상온의 음식이 상하는 계절이 도래하고야 만 것이다.

완전히 모르지는 않았다. 터벅터벅 어두컴컴한 길을 걸어 체육관으로 갈 때 산딸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핀 것을 보았고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반 팔 티셔츠 차림이었다. 두꺼운 플리스를 걸치고 있는 내가 있었고 시간이 나만 남겨놓고 흘러가는 것 같아 어리둥절했었다.


6월이다. 뻔뻔스럽게 자신이 32살 즈음이라 여기고 사는 나로서는 이 시간의 속도를 쫓아갈 수가 없다. 작년 이맘때는 뭘 했나 곰곰이 되짚어 보았는데 맙소사 이혼을 했구나. 그때의 나는 서류를 마무리하고 혼자 서울 재즈 페스티벌을 보러 갔었다.


어제가 오늘이었는지 오늘이 어제였는지 내일이라고 별다른 게 있을까 싶은 날들이 모이고 쌓여 작년과 다른 올해를 만들었다. 대부분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고 지내다 보면 기쁨이 불쑥 찾아왔고 까불거리면 보란 듯이 절망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도무지 종 잡을 수 없는 하루를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분명 오늘 하루도 끝나기 때문에. 하루 중 침대에 누워 오늘이 끝나가지만, 아직 내일이 오지 않은 때의 마음이 가장 평온하다.


밥 차리는 시간을 줄여보겠다는 야무진 계획은 결국 무산되었다. 내 안에 남아있는 똑똑이가 멍청이에게 말했다. 야. 핸드폰 보는 시간이나 줄여.


멍청이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잠깐 쉰다는 핑계로 소파에 누워 핸드폰을 보다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화들짝 놀란 나머지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멍청이의 언니는 내가 핸드폰 보고 노닥거리고 있었다는 걸 바로 알아챈다. 그녀는 놀고 있음 백화점으로 나오라고 말했다.


아니... 사실 지금까지 공부하다 잠시 쉬는 거라고 우물쭈물하다가 냉큼 나가겠다고 말하고 오랜만에 외출준비를 했다. 백화점 가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주차장 입구를 못 찾아 한참을 헤맸다. 평일에도 백화점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언제나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팔자 좋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아니,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다니. 돈이 그렇게 많다니.


그 돈 많은 사람은 나의 언니였다. 언니는 기분이 좋지 않다며 지극히 미국 스러운 패키지의 비누, 바디위시, 바디미스트를 덥석덥석 잡아 장바구니에 마구 넣었다. 나에게도 원하는 걸 담으라고 했지만 차마 돈이 아까워 그럴 수 없다. 나는 도브비누만 쓰는 여자라고 한사코 거부하며 언니가 바디워시를 집어들 때마다 옆에서 안절부절 그만 사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원래 점심을 먹지 않는 언니가 점심까지 먹자고 한다. 둘 다 샤우룽바오가 있는 식당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서 한참을 그거... 그거 뭐지? 만 수없이 주고받다가 결국 검색 끝에 식당 이름을 밝혀냈다. 언니는 혼자 오면 단일 메뉴만 먹는데 같이 와서 다양하게 먹을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으나 실은 밥을 사주려고 나를 불렀다는 걸 안다. 우리는 여러모로 서로에게 살갑지 않은 자매지만(살가워지는 건 상상만 해도 견딜 수 없다) 언니는 언젠가부터 본가에서 엄마가 준 먹을거리를 한가득 들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짐을 나눠 들고 차 앞까지 들어다 준다.(참고로, 그녀는 현관문 앞에 놓인 배달음식도 가지러 가기 귀찮아서 잘 시키지 않는 사람이다)


누가 차려주는, 게다가 누가 사주기까지 한 점심은 끝내주게 맛있었다. 그리고 언니는 끝내 호랑이 슬리퍼까지 사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맛있게 먹고 행복해하고 그저 집까지 바래다주는 일뿐.


나의 돌발적 기쁨은 이렇게 사소하고 멋진 것이며 그래서 집에 오자마자 호랑이 슬리퍼를 신고 까불거리며 공부를 시작할 수 있다. 6월이다. 아직 올해는 끝나지 않았고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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