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
보유한 주식이 몇 개인지 셀 수 없을 만큼 문어발식 투자를 하는데 현재 투자는 일시적으로 멈춘 상태고, 이보다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건 마음이 아파서 투자 종목의 개수를 정확히 셀 수 없는 상태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한 달 사이에 쳐 물렸던 주식 5개를 탈출하는 기적을 경험했고 내가 팔면 그 종목이 치솟는 진리를 또다시 확인하였다. 내게도 12개의 주식만 있으면 좋으련만 그보다 더 많은 종목이 남아있고 언젠가 코스피 5000이 도래하는 시대를 맞이하면 탈출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세상일이란 모르는 거니까.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단언했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기꺼이 그곳을 내 발로 들어간다. 인간은 낯선 괴로움보다는 익숙한 괴로움을 택하고 지금의 힘듦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미래의 고통쯤은 감수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막상 그곳에 서서 과거의 나를 책망하고 다시 다른 미래를 꿈꾸고. 나는 이 과정을 착실하고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취업했다. 그토록 바라던 취업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공부에 매진하려는 순간에 찾아왔다. 그동안 쳐 물린 주식의 개수를 헤아려 보지 않는 심정으로 얼마나 많은 회사에 지원했는지 확인하지 않았고 총 6번의 기회와 3번의 면접 끝에 나타난 성과다.
애처롭게도 줄곧 합격 소식을 듣고 난 후의 내 모습을 상상했었다. 4월, 헤드헌터가 중국 상하이의 브랜드 실장 포지션을 제안했을 때 나는 이미 고층건물이 즐비한 상하이 어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을 두드리는 멋진 나를 상상했었다. 그 망상은 현실이 되지 못했고. 역시 합격의 순간 같은 건 일어날 수 없는 망상의 순간이라 생각했었다.
‘이게 되네?’
망상의 순간이 현실이 되었다. 물론 상하이의 고층건물 사이에서 실장이라는 멋진 타이틀을 달고 일하는 모습은 아니다. 전 직장과 비교하자면 모든 면에서 뒤처지는 조건이지만 내게는 다른 선택권이 없고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다.
그렇게 바라지 마지않던 일이었건만, 돈을 벌 수 있다는 안도감도 잠시 오만가지 감정의 쓰나미가 들이쳤다.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버틸 수 있을까? 서울 생활은 괜찮을까? 엄마, 아빠, 언니, 친구들은? 바다, 부산은?
기쁘고 슬프고 설레고 두렵고 의욕이 넘치다가 금세 기운이 빠지고 한시름 놓았다가도 앞길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헷갈리지 않는 단 하나의 명확한 사실은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20대로 돌아간 것만 같지만 그 시절의 나처럼 행동했다가는 썰려 나갈 게 분명해서 최대한 어른스럽게 행동할 작정인데 잘 될지는 모르겠다. 나름 산전수전 겪어서 예전과는 다른 나라고 생각하지만 긴박한 상황을 맞닥트리면 여전히 나는 내가 튀어나온다. 그래서 미리 미간과 이마에 보톡스를 맞았다. 이것은 긴박한 상황에 빡쳐서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치밀한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다.
보톡스가 통하는 정도의 일이라면 기꺼이 그렇게 할 생각이다. 예전의 나처럼 대놓고 인상을 쓰거나, 인상을 쓰지 않으려 용쓰다가 지레 나가떨어지지 않고.
다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