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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여름.

나는 그 말이 꼭 맞다고 생각했다.

by 윤비

공기가 무거워서 숨 쉴 때마다 폐가 무거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올해는 대단히 습한 여름이 되려나 보다. 이토록 습한 계절에 코피가 터지고 입술도 터지고 머리가 터지고 끝내 마음도 터졌다. 언제나 그렇듯, 이러한 상태가 정당한 것인지를 가늠하고 언제나 그렇듯, 이 괴로움은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판결이 난다.

비 오는 날 창문을 여기는 건 집 안을 더 습하게 만들 뿐이지만 공기에 짓눌려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비에 젖은 풀 내음이 기다렸다는 듯 치고 들어온다. 그 냄새가 좋아서 한참을 열어두었다. 아랫집에서 고소한 콩나물밥 냄새가 올라온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남의 집밥 냄새다.

습한 계절은 다시 식욕을 앗아갔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살은 빠지지 않고 오히려 쪘다. 번뜩 갑상샘저하증을 검색하는 걸 보면 죽기는 싫은 모양이다. 며칠 전 K에게 내 우울의 척도는 무기력함이 아니라 죽고 싶은가 아닌가로 판단된다고 말했는데 이것도 다 헛소리고 허세였나 보다. 머쓱.


얼려둔 밥을 꺼내서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큰엄마의 친구분이 주신 땡초를 때려 넣어 만든 양념간장과 김 양식을 하는 외삼촌네의 김을 꺼냈다. 냉장고 밖에 꺼내놓은 미지근한 물을 한 모금씩 마셔가며 김에 밥을 싸 먹었다. 그럭저럭 잘 먹다가 2/3쯤 먹고 나면 밥 넘기기가 매우 고역스럽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기다리는 일을 힘들어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못 견디는데 내가 지금 그 일을 동시에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기다리지 않고 무엇이든 하면 되는 것이라 이렇게 나의 정당하지 못한 괴로움을 전시하는 중이다.

며칠 전 나는 햇살이 내리쬐는 강남의 어느 고개 위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이리저리 걷고 있었다. 약속까지 남은 시간은 애매한 20분. 다시 지하철역으로 내려가 낯선 노인 옆에 앉았다. 팔짱을 끼고 허리를 곧추세웠을 때 재킷 안주머니 쪽에서 두둑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그것을 꺼내자 똬리를 튼 푸른색 넥타이가 길게 딸려 올라왔다.


입고 나온 재킷은 명백히 남성용이지만 내 것이었고 넥타이는 누군가에게 주었던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어떤 불길한 징표라도 되는 듯 한참을 어이없이 노려보다가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약속이 끝나고 나서야 화장실 쓰레기통에 살포시 넥타이를 떨어뜨리고 나왔다.


흔적은 아무 곳에서나 튀어나온다. 콩나물밥 냄새를 맡았을 땐 전에 살던 집 아랫집에서 풍겨오던 생선찌개 냄새가 반사적으로 떠올랐었다. 단지 그것뿐이다. 더 이상의 감정은 쥐어짜도 나오지 않고 나도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만 한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지금도 지나가겠지.


우울함도 습관이고 습관은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다. K는 내가 65%쯤의 우울에 잠겨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꼭 맞다고 생각했다. 95%의 우울을 품고 있던 사람은 이제야 65%에 도달했다. 이 습한 계절이 끝나고 나서도 65%의 습도를 유지한다면 병원에 가 볼 생각인데 산뜻하게 50%의 우울함을 가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그전에 로또나 걸리면 더 좋고. 머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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