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
볼펜을 오래 쥐고 있어서 중지에 굳은살이 박이기 시작했지만, 그러면 뭐 하나 돌아서면 까먹고 돌아서면 까먹는 슬픈 장면이 계속 연출되고 있다. 이 정도의 돌머리라는 걸 인강 결제 전에 알았다면 좋았으련만. 돌머리는 너무도 답답하고 화가 나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눈물을 훔치며 달리는 돌머리. 그것이 요즘의 나.
지난주에 면접을 봤고 오늘 불합격 소식을 들었다. 몇 번 겪은 일인데도 또르륵 진이 빠져서 잠시 앓아누웠다. 돌머리라는 걸 알아버려서 내 자리가 아닌가 보다 하고 쉬이 넘어가지지 않는다. 유치하게 세상이 나한테만 가혹하게 구는 것 같아 서럽다.
부모님과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이 상태로 나갈 수 없어 잠시 눈을 붙였다. 힘이 빠지면 억지로 힘내지 않고 대신 잠을 잔다. 전에 없이 꿈속에 엄마, 아빠, 언니가 자주 나온다. 언니 방에서 단잠을 자는데 언니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날 흔들어 깨웠다. ‘엄마가 밥 먹으래’ 옆에 있던 쫄랑이도 덩달아 잠에서 깬다. 털이 짓눌린 채 꼬순내를 내뿜는 개를 쓰다듬고 밥 냄새가 풍겨오는 쪽으로 개와 함께 코를 킁킁대던 휴일 오후의 어느 날, 나는 여전히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쏙 들어갔던 눈이 나 여기 있소 하고 다시 나타난다. 그 눈이 나한테 말한다. 이미 지난 일이니까 털어내고 공부나 하라고. 구직에 대한 불안감을 내비치면 더 불안해할 엄마를 알아서 나는 최선을 다해 밝은 척을 한다. 오늘의 낮잠도 그것을 위한 것이었다. 게다가 어버이날이지 않은가. 나의 불안감은 나의 몫이다. 어른답게 굴자고 다짐하며 집을 나섰다.
석가탄신일에 조금 예쁘게 갔더니 엄마가 매우 좋아해서 또 꾸며볼까 싶었지만, 장어구이를 먹는 거라 곧 빨래통에 들어가야 할 옷을 챙겨 입고 갔다. 다행히 그들도 내일 당장 세탁해야 할 옷을 챙겨 입었다고 말해서 모두 애쓰지 않아도 절로 웃는 얼굴이 되었다. 어른답게 굴자는 다짐도 잊은 째 오늘도 당연하다는 듯 엄마, 아빠가 구워주는 장어를 먹었다.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눈꼬리와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간다.
가끔씩 이렇게 그들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다 혼자 찔찔 우는 짓을 하는데, 진정 부모님을 향한 게 아니라 날 향한 눈물임을 깨달으며 눈물은 짜게 식는다. 자식의 사랑은 이런 것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부모의 사랑이 당연한 건 아니다. 그들도 사람이니까.
여전히 이 세상엔 부처의 자비와 같은 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러길 바라는 마음은 존재하고 사람들은 그걸 무조건적인 사랑이라 믿기로 한 것 같다. 오랫동안 그 마음조차 믿기 힘들었고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내가 하는 생각과 행동을 쫓아가다 보면 결국 그 끝에는 그 마음이 있었다. 그동안 내가 가는 길이 험난하다고 느꼈던 건 내가 하는 사랑이 어설퍼서였다.
험난한 길은 걷고 싶지 않으므로 어설프게 사랑하는 모든 것을 의심 없이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기로. 정확히는 그러고 싶은 그 마음을 믿기로 했다. 나는 뱃속에 장어를 든든하게 넣고 뜬금없이 이런 엄청난 결론에 도달했다. 그 마음은 아무리 퍼주어도 줄어들지 않았고 무엇보다 괴로울 게 없었다. 이런 마음으로 돌머리는 이제 울면서 뛰지 않고 웃으며 뛰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