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입시절

17년 5개월 버티기의 시작점

by 윤비




내가 소속된 디자인팀은 여자가 100%인 곳으로 그것이 오히려 위계질서를 더 강하게 만들어 버린 듯한 분위기였다. 그 친밀함을 가장한 날 선 느낌의 묵직한 공기는 4년간의 대학생활에 잠시 잊고 있었을 뿐 지난 12년간 익히 알고 있었던 분위기였다. 정확히 다시 여고에 입학한 기분이 들었다.


내 인생의 암흑기라고 볼 수 있는 여고시절. 나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면 가슴이 욱신거려서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다. 중학교 때는 다행히 각 학년마다 맘에 맞는 친구들이 3~4명 정도는 있어서 대부분의 시간을 즐겁게 보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는 그 친구들 중 그 누구와도 같은 학교로 진학하지 못했다.


지독하게 내향적인 나는 그때의 공포심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래도 그것이 내 맘을 열게 했던 것인지 지금의 절친들은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이다. 문제는 2학년 때부터 인데 나에게 호의를 가지고 접근하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나는 마음을 열지 못했다. 맘이 끌리지 않으면 노력이라도 하면 될 텐데 나는 그게 죽어도 안 되는 인간이었고 계속 1학년 때 친구들을 찾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친구들이 오히려 나보다 더 상처를 받았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철저히 호의를 무시했으니.


물론 짝꿍이나 앞, 뒤에 앉은 친구들과는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여고생에게 필요한 것은 ‘단짝 친구'다. 화장실도 같이 가고 체육시간에도 짝을 맞춰 공을 던질 수 있는 그런 친구 말이다. 난 그런 단짝 친구가 없었다. 그럴수록 나는 그 당혹감을 숨기기 위해서 ‘I’M OK’ 모드를 연기했다. 사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나를 끼워주기 싫어하는 무리들의 미묘한 표정과 말투 그런 것들이 상처가 됐다. 그래서 그 무리에 끼워주길 바라며 노력하는 건 더 용납이 안되었고 알아서 스르륵 떨어져 나와서 혼자가 익숙해지는 연습을 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게 맘먹은 대로 될 리가 있겠는가 그럴수록 원래 차가운 내 표정은 더 차가워지고 혼자 있는 시간은 더 늘어갔다.


담임이나 나를 관심 있게 보는 선생들은 나의 이런 교우관계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2학년 때 그나마 체육시간에 공놀이 짝이었던(알고 보니 이 아이도 은따) 아이를 3학년에도 같이 배정해 준 것을 보면


이런 경험 덕분에 ‘또래 집단’과 유사성을 가진 집단의 유형을 보면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이번에도 그 무리에 끼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아직도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싫었고 내 존재마저 부정하고 싶었다. 내가 내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무척 괴로운 일이 었는데 , 그것은 회사 신입시절 나를 전반적으로 지배했던 감정이었고 나는 또래 집단을 쏙 닮은 그녀들 앞에서 어느새 여고생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신입의 첫 번째 업무는 출근하자마자 선배님들의 취향에 맞춰 커피를 타서 나르는 일이었는데, 조금이라도 물이 많거나 적으면 핀잔이 날아왔고 아침인사를 OO처럼 크고 밝게 하지 않는다고 불려 가서 혼난 적도 있다.


자연스레 나와 동기들은 점심 식사 후 작은 휴게실에 모여 그날의 고충을 쏟아놓기 시작했는데 그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 1시간도 안 되는 시간이 그나마 숨통을 트이게 했고 선배들은 그게 그렇게 꼴 보기 싫었던 모양으로 그 사적인 모임마저 금지시켰다.


내가 생각한 회사는 일의 대가로 돈을 받는 곳이었는데, 알고 보니 온갖 부당함과 스트레스를 견디는 몫으로 돈을 받는 곳이었다. 나는 그녀들이 요구하는 것들의 팔 할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 팔 할의 것들을 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곤욕스러웠다


흔히 내향적이면 고분고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이 어디 그렇게 단순한 동물이던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무척이나 내향적이고 낯을 가리는 동시에 황소고집이라 건방지고 오만하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끊임없이 불만을 쏟아 내면서 시키는 일은 또 굉장히 열심히 한다. 얼굴은 시도 때도 없이 빨게 지는 주제에 무례한 사람에게는 응당 그에 상응하는 말 한마디를 톡 쏘아줘야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으며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분위기 전환용 말 한마디 헛투루 하지 않고(=하지 못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까지 불편하게 만드는 기술을 가졌다 하아


그러니까 썩 유쾌한 타입의 성격은 아니며 한마디로 이쁨 받기는 글렀단 말이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나 자신을 부정하며 변화하려 애썼지만 결국 나는 내 성격을 인정해 주기로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날 버티게 했던 원동력이 되어 주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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