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와서 개같이 달렸다.

부산사람

by 윤비

정수리에서 발가락까지 땀에 절여졌던 계절을 보내고 이곳에서 첫눈을 맞이했다. 눈이 내리든 말든 시큰둥한 사람들 속에서 자꾸만 창밖을 힐끔거렸고 눈 깜빡할 사이에 쌓인 눈을 보고 나도 모르게 히익 소리를 질렀다. 눈이 쌓이기도 하는구나. 사진을 찍어 엄마에게 전송했다. 엄마 눈이 와.


퇴근하자마자 굴진짬뽕(겨울에 한 번은 꼭 먹게 된다)을 급하게 끓여 먹고 마냥 사랑스럽게 눈을 바라볼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직감에 이끌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오늘 같은 날은 오늘 하루뿐이다.


공원으로 향하는 마음은 조급하고 간질거렸다. 아무도 없는 새하얀 공원에 다다르자 실룩대던 입꼬리가 한껏 위로 올라갔다. 눈길 닿는 곳마다 탄성을 자아내는 풍경이 도사리고 있어 자꾸만 발길이 멈춰진다. 춥지도 않다. 갑자기 냅다 달렸다. 달리지 않고서는 이 벅참을 표현할 길이 없다는 듯이. 마치 개가 된 듯이.


부산 사람은 이곳의 겨울이 보고 싶었다. 어쩌면 이 공원의 겨울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그 무더운 여름을 견뎠는지도 모른다. 사계절을 겪어보고 싶었다. 누군가에겐 그저 일상일 뿐인 풍경이 나에겐 간절했고 언제나 그랬듯 그토록 바랐던 풍경은 아무런 예고 없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제 내게 남은 계절은 봄 하나다.


아름다운 걸 보면 왜 자연스레 나누고 싶어 지는가. 좋아하는 부산 사람들에게 이 풍경을 전해주고 싶어 또 한 번 마음이 조급해져서 또 한 번 개같이 달렸다. 나는 개 같이 달리면서 생각했다. 이거면 된 거 아닐까.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고 이 풍경을 나누고 싶은 이들이 있고 내가 눈 내린 풍경을 보겠다고 밤에 뛰쳐나갈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


최근엔 예고 없이 찾아온 욕심이 나를 뒤흔들어 놓았었다. 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고 대단히 대단한 사람이 되길 바란 것이 아닌데도 초라했다. 더 나은 회사에 다니고 싶었고, 너무 하찮은 직무를 맡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사람이 되길 바랐다. 또 그랬다. 그것이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아닌데도.

퇴근 후에 편의점에서 꿀꽈배기 2 봉지를 샀다. 산책 나온 비숑이 과자봉지가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듣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부리나케 방에서 뛰쳐나오던 우리 쫄랑이와 닮았다. 또 잊었다. 이 정도의 행복만 있어도 괜찮다. 내 마음에 이 정도의 여유만 있다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


부모님이 티격태격하며 담갔을 게 분명한 올해의 김치가 맛있어서 행복하고 새로 산 립스틱이 잘 어울려서 행복하다. 도서관에서 책을 잔뜩 빌릴 수 있어서 행복하고 20분 달리던 달리기를 25분 달릴 수 있게 되어 행복하다. 이건 분명 내가 원하던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며칠 전 J가 말했다. 우리 큰 거 바라지 말고 귀여운 이모티콘 같은 거나 욕심내고 살자고. 몇 달에 한 번씩 공연 보러 갈 돈을 벌 수 있으면 된 거라고. 마치 나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 툭 던진 그 말이 나의 행복을 다시 찾아주었다.


이 회사에 너무 많은 걸 바랐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나는 이곳의 사람들과 아름다운 풍경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진 못할 것이다. 싫어하는 마음조차 내어주지 못할 거다. 끝내 하찮다고 생각할 일만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또한 이거면 된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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