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머물렀던 자리의 온도

출간 소식을 전합니다.

by 윤비

12월이 되자 몇 년은 묵어 보이는 트리와 먼지 낀 장식물이 곳곳에 설치되었다. 오너가 불교 신자인 것 치고는 과하다 싶을 정도였는데 무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직원들에게 케이크까지 주는 것이 아닌가? 단, 성인이 되지 않은 자녀가 있는 직원들에게만. 고로 이혼하고 원룸에 혼자 사는 늙은 나는 케이크를 받지 못하였다.

오랜만에 열이 받았다. P 이사는 요즘 누가 케이크를 먹냐며 케이크를 받아 놓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여기 있는데! 나 케이크 먹는데! 나도 먹고 싶은데!’


퇴근길에 홀케이크를 사서 케이크 위에 올려진 딸기를 독식하며 마음껏 퍼먹으려 했다. 예약하지 않고서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케이크를 구매할 수 없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모두가 퇴근한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야근을 하고 케이크도 없이! 터덜터덜, 복작복작한 지하철을 통과해서 집에 도착했을 때, 문 앞에 놓인 택배 상자를 보았다. 그것은 오래 전의 내가 예약 배송으로 시켜놓은 굿즈.

택배 상자를 풀고 그것들을 감상하느라 끼니와 케이크를 잊어버렸다. (평소에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손을 씻고 된장국부터 데운다.) 뒤늦게 라면을 끓여 먹고 후식으로 바나나를 먹었다.(바나나가 우울증에 효과 있다는 말을 듣고 엄청난 양의 바나나를 싸게 구입한 후로 징벌처럼 하루에 3~4개의 바나나를 먹고 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몇 주 전에 도착한 블록을 땀이 흥건히 흘러내리는 손으로 바들바들 떨면서 조립했다.

블록을 어질러 놓은 채 침대에 누워 습관처럼 메일함을 확인했을 때, 출간 소식을 전하는 메일을 발견했다. 그렇다. 나는 책을 계약했었다.

올해 초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쿠팡에 나간 적이 있다. 그때의 경험담을 쓴 글을 보고 ‘푸르르 프레스’라는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물류센터에서 일한 사람들의 경험담을 엮은 책을 기획 중인데 함께 해보지 않겠느냐고. 4월에 있었던 이야기다.


매일매일 땀과 멸시를 뒤집어썼던 한여름. 나는 퇴근 후 움직일 때마다 뽀드득 소리를 내는 에어매트 위에 앉아 글을 썼다. 주말 동안에도 썼다. 몇 장 되지 않은 글이라도 책으로 발간된다고 생각하니 부담감과 부끄러움이 엄습해 왔다. 시간이 흘러 이 책을 열어봤을 때 싸이월드 속 사진을 보는 감정이 들지 않기를 바라며 담백하게 쓰려했지만, 마음이 제일 초라했을 때여서 자꾸만 감정이 과잉되었었다.

내년 2~3월 즈음에 출간되리라 예상했던 책은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크리스마스이브에 도착했다. 오래 전의 내가 나에게 보낸 굿즈처럼, 이 책은 한여름 밤의 내가 나에게 보낸 선물일지도 모른다.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많은 요즘이지만 내가 쓴 글이 대형 서점과 인터넷 사이트에서 판매된다는 사실은 매우 유의미했다. 무덤덤했던 감정이 시간이 지날수록 벅차올랐다. 올 한 해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한 건 아니구나. 나도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절망스러울 정도로 추웠던 그 겨울에 용기를 내지 않았더라면, 그곳에서의 경험을 글로 남겨 놓지 않았더라면 이 책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앞서 나는 실패할 힘조차 없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그 고통스럽던 경험이 훗날 나를 방긋 웃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이 얼마나 고리타분한 이야기인가. 그러나 이 고리타분한 진리를 경험할 때마다 나는 살고 싶어진다. 죽고 싶지도 않지만 살고 싶지도 않은 나를 살고 싶게 한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내가 유명작가가 되는 드라마틱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책을 구매해 주시면 몹시 고마울 겁니다.) 앞으로도 나는 쿠팡 물류센터에서는 비교도 안될 만큼 더 심한 욕설과 고함이 난무하는 곳에서 일할 것이고 또다시 바나나를 궤짝으로 사다 놓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경험도 언젠가는 이 책처럼 나를 찾아줄지도 모른다.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그 선물을 기대하며 오늘도 바나나를 먹고 블록을 조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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