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을 기다리며 쌍꺼풀 수술 상담을 했다.

지금의 삶이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by 윤비

쌍꺼풀 수술 상담을 했다. k의 남편이 말하길 나는 ‘황신혜’ 과의 외모를 가진 사람이라(참고로 k는 ‘심은하’ 과의 미녀다) 눈, 코, 입의 자기주장이 강한 편인데 최근 눈이 말썽이다. 노화가 찾아온 것이다. 오른쪽의 인라인 쌍꺼풀 위로 짙은 겹주름이 생겼고 왼쪽의 겹 쌍꺼풀은 장동건 저리 가라 싶을 정도의 두꺼운 아웃라인 쌍꺼풀이 자리 잡았다. 안 그래도 돌출안에 눈꺼풀이 얇아서 주름이 생길 수밖에 없는 타입인데 노화로 인해 눈두덩이 지방이 빠지면서 겹주름이 급격히 진해지는 바람에 눈썹과 이마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눈 뜨기가 힘든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눈 뜨기 힘들어도 지금 눈이 맘에 들었다면 수술은 생각지도 않았을 거다. 고로 나는 예뻐지기 위해 쌍꺼풀 수술을 하려는 것을 밝힌다.


연말이 되면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일들을 반추하며 내년을 다짐하게 된다. 결과를 따지지만 않으면 쌍꺼풀 수술 말고는 딱히 하지 못했던 일이 없었다. 자격증을 땄고, 안 돌아가는 머리를 붙잡고 공부를 시도했고 전국을 돌며 공연을 보러 다녔다. 부모님과 자주 시간을 보냈고 친구들과 여행도 가고, 이력서를 꾸역꾸역 넣어서 면접을 보고 어쨌든 취업도 2번이나 하는 우여곡절 끝에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어제는 10년 전부터, 아니 어쩌면 더 오래전부터 몹시 사고 싶었지만, 비싸서 사지 못했던 러쉬의 ‘대디 오’ 샴푸를 샀다. 평소 1000ml에 15,000원짜리 샴푸를 쓰는 사람이 500g에 74,000원 하는 샴푸를 산 것이다.

그 영롱한 퍼플 컬러의 액체가 한 방울이라도 허투루 바닥에 떨어질까 노심초사하며 오래오래 머리를 감았다. 정수리에서 풍겨 나오는 제비꽃 향기를 맡으며 잠들었고 일어나서도 향기가 남아 있는지 확인했다. 500g에 74,000원짜리 샴푸를 살 수 있는 삶이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넓은 집에 살 땐 한겨울에도 보일러를 틀지 못했다. 덕분에 돈을 아끼고 감기에 자주 걸리지 않았지만, 따뜻한 곳에 가면 두 볼이 유난히 빨갛게 달아올라 괜스레 추위와 가난은 숨길 수 없다는 시답잖은 농담을 했었다. 지금은 집이 작아서 가스비 걱정 없이 보일러를 틀어댄다. 그리고 보일러를 틀 수 있는 삶도 꽤 괜찮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자차로 20~30분이면 출퇴근이 가능했고 지금은 버스와 지하철 3번 환승 끝에 회사에 도착한다. 예전에는 조용하고 바다가 보이는 넓은 아파트로 퇴근했고 지금은 술 냄새를 푸이는 사람들과 지하철을 함께 타고 모델이 즐비한 6평짜리 오피스텔로 퇴근한다.

나는 지금의 삶이 꽤 괜찮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내가 원했던 건 결국 이런 삶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마저 한다. 내 힘으로 밥벌이를 하며 나를 책임지는 삶. 가끔은 비싸서 엄두를 내지 못했던 샴푸를 사고 주말에는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고 가끔 친구들을 만나고 좋아하는 공연을 보고 곁에 없지만 언제든지 내가 원하면 가족을 만날 수 있는 지금이.


이것 이상 무언가를 바란다는 건 욕심일지도 모른다. 지금보다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집이 반드시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진 않을 거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금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내년에도 무엇이든 도전하기를 멈추지 않고 잘 살아가고 싶다. 심지어 2026년에는 산뜻한 쌍꺼풀 라인을 가진 새로운 버전의 내가 나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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