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어려운 일
엘리베이터 안에서 종종 마주쳤던 9층 아저씨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 차림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그런 차림을 하는 거겠지 했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는 만날 때마다 다른 명품 룩을 선보였다. 우연히 종이 쓰레기를 버리러 총총 걸어가는 아저씨를 발견했는데 그는 족히 100장은 될 것 같은 명품 브랜드 종이백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남편에게 이 진귀한 장면을 고해바쳤는데 남편은 9층 아저씨와 똑같이 명품을 휘감은 9층 아줌마를 자주 보는 모양이었다.
흔해 빠진 게 명품이고 명품백 2~3개 없는 사람이 흔하지 않은 세상이지만, 보통의 월급쟁이들조차 가방뿐만 아니라 아이템도 실로 다양한 명품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어김없이 신기하다. 도대체 돈은 어디에서 나는 거지?
그 흔해 빠진 명품백 하나 없는 내가 가진 유일한 명품은 6년 전 구매했던 까르띠에 시계가 전부다. 그 당시 무슨 허세였는지 모르겠다만 제대로 된 시계 하나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나는 각 잡힌 유니폼을 입고 냉정한 미소를 띤 매장 직원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담감에 정신이 아찔해졌기 때문에 그런 곳에선 뻔뻔하게(내 기준에서) 행동하는 남편을 데리고 갔다. 그리곤 마치 죄진 사람처럼 손바닥에 땀이 흥건한 체로(다한증이다) 650만 원 시계를 바로 사버렸다. 1억짜리 시계도 척척 사는 사람이 많다지만 내게 650만 원짜리 시계란 650억짜리와도 같았다.
그 사치품이 최근 배터리가 나갔다. 또 그 아찔한 곳을 가야 한단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방치하면 배터리 액이 흘러 시계가 망가진다니 더 아찔해져서 얼른 매장에 갔다. 바로 AS 접수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건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이었나. 나는 웨이팅을 걸어놓고 무려 1시간 30분을 기다려야 했다.
시간을 견디는 일에는 능할지 모르지만 시간을 기다리는 일에는 조급증이 도진다. 게다가 그 기다림의 시간이 얼마인지 측정 불가할 때는 아무리 맘을 느긋하게 가져보려 해도 책을 읽거나 인터넷 서핑조차 집중하지 못한다. 그건 마치 가슴속이 불타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라서 연기를 밖으로 배출하기라도 하듯 한숨을 길게 내쉬길 무한 반복한다. 그러니까 내게 기다리는 일은 정말 진 빠지는 일이다.
매장에 입장해달라는 문자를 받자마자 총알같이 튀어나간 나는 퀭한 눈으로 직원분께 물었다. '보통 이렇게 웨이팅 시간이 긴 건가요?' 그분은 아련한 미소로 '네'라고 답했다. 이럴수럴수럴수가. 세상 사람 전부 이렇게 명품을 산다고?
2주 뒤 테크니션 센터에서 전화가 왔는데 시계는 배터리 교체뿐만 아니라 세부 청소도 필요해서 금액이 총 477,000원이 나오지만 1월에 접수가 되면 프로모션 적용이 되어 무상수리가 가능하니 12월 접수증을 직접 매장으로 가서 1월 접수증으로 바꾸라 했다.
난 그 477,000원이 너무 아깝기 때문에 오늘 또 1시간 30분을 기다렸고 시계를 받으려면 10주를 더 기다려야 한다. 당이 떨어져 치즈 타르트를 사서는 봉투값 100원이 아까워 옆구리에 끼고 집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다. 사치도 아무나 부릴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시계를 소유한 지난 6년 동안 그 만족감과 우쭐함은 곧 행여나 스크래치가 날까 복잡한 인파 속에서 누군가 내 시계를 훔쳐가지는 않을까 아니면 내가 술 먹고 꽐라가 돼서 잃어버리지는 않을까라는 우려로 대체되다가 이젠 짐이 돼버린 것만 같다.
비로소 알았다. 박봉의 월급쟁이들이 명품을 살 수 있었던 이유를. 그들은 돈보다 마음의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여유로움을 항상 시기 질투했다.
퇴사를 하면 마음의 여유는 자연스레 따라오는 줄만 알았다. 이 세상에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음을 느낀다. 뭐든지 해치워버려야 하는 내 조급한 맘에 여유라는 것이 빛을 발한다면 가슴속에 불덩이를 가지고 연기를 토해내는 일도 점차 사그라질지 모른다. 기다리는 일이 더 이상 힘들어지지 않는다면 드디어 내게도 여유라는 것이 생긴 거겠지. 그땐 평온하게 매장에 들어가 명품백을 척척 살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