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어른의 모습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

by 윤비

백수는 요즘 나태 지옥에 빠져있다. 나태하지 않았던 날들 역시 백수의 일상일 뿐이지만 스스로에게 나름 떳떳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는데 말이다.

아침 9시에 주식을 확인하고 이불속에서 꼼지락거리다 다시 잠들기를 반복하다 12시 30분에 침대 속을 겨우 기어 나왔다. 그대로 거실 한구석에 있는 실내 자전거 위에 구겨진 몸을 올려놓고 1시간 동안 페달을 밟았다. 이것만으로 오늘 할 일을 마친 기분이 뇌리를 스치는 바람에 조금 떳떳해진 마음으로 백수 전용 자리에 앉아 넷플릭스에 로그인했다.


2013년 방영된 고바야시 사토미 주연 일드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


우연히 선택한 영화나 책이 현재 나의 고민을 관통할 때 운명의 짝을 만난 것 같은 감동을 받고야 마는데 이번 일드가 그랬다. 아키코는 내가 줄곧 지향했지만 흐릿해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괜찮은 어른의 모습이 가장 구체적으로 표현된 캐릭터였다.



‘다른 사람하고 일을 할 때는 자기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 아닐까? 물론 부딪치는 일도 있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지. 아무것도 안 하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하기보단 훨씬 좋을 거야’


아키코라면 분명 자기 생각을 당당하지만 부드러운 태도로 말했을 것이다. 나는 일할 때 당당하게 내 생각을 말하는 편이었지만 거기엔 상대방을 몰아붙이거나 무시하는 오만함이 깔려있었다. 그것이 성과를 내지 못하면 부드러운 척 연기했는데 어김없이 비꼬는 말투가 튀어나왔었다. 흉내 낸다고 되는 일이 아닌 거다.



갑작스레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혼자 식사를 하는 알 수 없는 표정의 아키코와 빈티지 원형 식탁, 화면을 채우는 밝은 햇살의 기운이 담긴 장면을 보면서 나는 상실감보다는 이어질 삶에 대한 기대감 같은 것을 느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은 분명 슬픈 일일 테지만 아키코는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다. 남겨진 사람들은 결국 혼자 남겨진 자신의 처지와 자신의 힘듦을 더 슬퍼한다. 순수하게 동정이나 안타까움 없이 누군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힘든 일이다. 아키코는 어머니의 삶을 인정했듯이 어머니의 죽음또한 담담하게 받아 들이며 홀로 저녁식사를 한다.



편집부에서 경리과로 부서이동을 권유받자 아키코는 회사를 그만두고 어머니의 가게에서 샌드위치 가게를 오픈한다. 그 과정에서도 역시 징징거림은 보이지 않는다. 난 회사에의 억울함을 잊지 못하고 아직도 꿈속에서 싸우고 있는데 말이다.



그녀가 운영하는 샌드위치는 가게는 어쩐지 나도 운영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착각을 들게 할 만큼 여유롭고 단순해 보인다.



아키코는 이복동생일지도 모르는 그를 찾아가지만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의 삶이 흔들리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녀는 차갑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감으로 사람들을 대하지만 거기엔 항상 따뜻함이 묻어있다. 과한 친절함을 베푸는 사람들이 불편하다 못해 무서울 때가 있다. 그들의 맘속에 꽤나 다른 감정들이 똬리를 틀고 앉아있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인데 나는 그들이 애쓰지 않을 만큼의 친절함을 베풀면 좋겠다 생각한다.


하지만 거리감을 설정하는 일만큼 살면서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저는 너무 착실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불량해지려고 합니다. 제가 자유로워져야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시작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제 방식대로 가게를 꾸려 나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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