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메인과 감자

잎사귀를 따먹고 열매를 수확하고 싶었다.

by 윤비

지난해 퇴사를 하고 로메인과 고수, 방울토마토 모종을 샀다. 이미 베란다와 집안 곳곳에 반려식물들이 넘쳐났지만 나는 잎사귀를 따먹고 열매를 수확하고 싶었다.


불행히도 고수 모종은 시든 상태로 배송되어 도착하자마자 죽었고 로메인은 길쭉하게 웃자라 노란 꽃을 피우고 민들레 같은 씨앗을 맺고는 생을 마감했다. 그래도 방울토마토는 겨우겨우 코딱지만 한 방울을 3알 맺었다.


죽어버린 것이 확실한 로메인을 뽑지 않고 그대로 놔뒀다. 시간이 지나면 살아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미련한 성격은 언제 어디서든 드러나는 법이다.


막내 이모가 처음 농사지어 수확한 감자를 보내줬다. 지금까지 우리 집에 온 모든 감자들은 아무리 빨리 먹으려 해도 어느새 싹이 돋아나 있었다. 이모의 감자 역시 감자 싹을 틔웠다. 이제 죽어버린 로메인을 뽑을 핑곗거리가 생긴 것을 알아차렸다. 감자보다 존재감이 확실해진 감자 싹을 도톰하게 도려내어 로메인이 있던 자리에 심었다.


감자 꽃이 예쁘다는 친구의 말을 듣자 로메인에 대한 조금의 안타까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심지어 로메인이 죽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자 싹에 잎이 돋아날 때쯤 감자 주위에 이름 모를 새싹들이 천지로 돋아났다. 이게 무슨 새싹인지 한참을 어리둥절하고 난 뒤에야 나는 이것이 로메인의 새싹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내가 감자 싹을 심을 때 로메인의 깃털 같은 씨앗들을 뽑아서 흙 주위에 뿌렸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감자처럼 새싹이 돋아날지도 모른다 생각하면서.



로메인의 새싹들은 감자를 신경 쓰지 않고 자기들끼리 옹기종기 계속해서 자랐다. 솎아줘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지켜만 봤다.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성격은 언제 어디서든 드러나는 법이다. 그러는 동안 감자잎은 보란 듯이 시들었다.


이번에는 미련 없이 감자를 뽑았다. 뽑은 자리를 정리하는데 노르무레한 것이 보인다. 가뿐하게 검지 손가락 하나로 주위의 흙을 파헤치자 지름 1.2cm 정도의 감자가 빼꼼 나타났다. 그렇게 감자 3알을 캐냈다. 로메인을 키우지 못했지만 어찌 됐든 나는 이 1.2cm 감자 3알로 생산적인 일을 하는 생명체를 곁에 두고 싶어 했던 나의 욕망을 채울 수 있었다.



감자는 그 찰나의 순간에도 감자 3알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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