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이 벌어 정승처럼 못쓴다.

개 같이 벌었던 지난날이여 안녕

by 윤비

‘개’처럼 벌었다. 여기서 ‘개’는 고됨을 뜻하겠지만 나의 ‘개’처럼은 외출한 동거인을 현관문 앞에서 기다리는 개의 모습과 같았다. 나의 동거인은 ‘돈’이었다. 꿈은 없었고 한결같은 목표는 내 집을 가지는 것이었다.

내 꿈속에 등장하는 집은 언제나 2층짜리 빨간 벽돌집이다. 지금의 아파트(현 부모님 집)에서 산 세월이 더 오래됐는데도 꿈속에서는 여전히 그곳에서 살고 있다. 꿈인 줄 알면서도 잠에서 깨면 안도했다. 거실도 없는 방 2칸짜리 주택. 화장실에 가려고 부엌 조명을 켜면 사사사삭 사라지는 바퀴벌레가 있던 곳으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디자이너가 되려고 관련 학과를 나와 취업했지만 그걸 꿈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절실한 건 디자이너보다 안정된 생활이었기 때문에 그건 단지 도구에 불과했을지도. 안정된 생활 없이는 꿈을 꿀 수 없는 나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안정된 생활이 내 집 마련과 결혼이라는 고루한 생각을 가진 20대 청년이 나였다.

결혼 후 본격적으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부모님 지원 없이 서로 모아놓은 돈으로 시작하느라 5000만 원 대출을 받아 9000만 원짜리 전셋집을 얻었다. 우리는 퀘스트를 이행하듯 대출금을 갚아나갔다. 이듬해 대출금을 완납하고 또다시 8000만 원을 대출받아 27평짜리 아파트를 구입했다. 어쨌든 결혼 2년 만에 내 집을 마련했다.(이것은 10년 전 이야기이고 서울이 아님.)


다양한 가계부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엑셀에 직접 가계부를 작성했다. 월 단위로 계산하지 않고 1년 단위로 예산을 짰다. 매월 지출하는 아파트 관리비, 보험료, 핸드폰 요금, 주유비 등의 고정비를 미리 쳐놓고 각종 경조사비, 자동차 세금 등 예측되는 모든 지출도 해당 월에 함께 입력했다. 그렇게 달마다 들어가는 고정비가 책정되면 거기에서 저축 70~80%를 제외하고 남는 돈만 썼다. 지출이 적은 달은 지출이 많은 달을 위해 아껴 써서 어떻게든 목표한 저축금액을 달성했다.


이것은 꽤나 혹독한 일이었다. 나는 700원짜리 음료수 한 병 마시는 것도 고민하며 살았다. 모든 예산이 타이트했는데 그나마 줄일 수 있는 것이 식비와 개인 관리비 정도였다. 식비조차 아껴야 하는 달에는 각종 김치 요리(김치찌개, 김치 콩나물국, 김치볶음밥, 김치전, 김치비빔국수 등)로 한 달을 버텼다.


몇 년 동안 검은색 만다리나덕 가방을 들고 다녔는데 실장이 아직도 그걸 들고 다니냐고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준 적도 있다. 그 후로 똑같은 디자인의 오렌지색 가방을 사서 그녀에게 보여줬고 그 가방 역시 몇 년 동안 주야장천 들고 다녔다. 내 주변에는 진심으로 나를 대단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대단하다고 하지만 궁상맞다는 눈빛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들,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 역시 내가 대견했고 궁상맞고 구질구질했다.


우리는 대견하고 궁상맞고 구질하게 또 대출금을 완납하고 저축을 했다. 그리고 다시 대출을 받아 40평대 아파트로 갈아탔다. 대출금은 예전보다 훨씬 더 큰 금액이었지만 회사 생활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이걸 다 갚기 전에는 죽어도 그만둘 수 없다는 족쇄가 철컹철컹. 승부욕이 느껴졌다. 오히려 저축할 때보다 대출금을 갚는 기간이 더 견딜만했다. 3년 뒤 우리는 마지막 대출 역시 완납했고 저축을 또 시작했다. 결혼생활 13년 동안 무식하게 말이다. 이것이 나의 20~30대 삶이었다.


이렇게 내가 집 장만에 목을 매고 있을 때 목표가 아니라 꿈을 가지고 넓은 세상에서 다채로운 경험을 한 이들은 당장 집은 없을지라도 집 10채를 살 수 있는 능력을 쌓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동안 협소한 곳에서 일상의 단조롭고 지루한 경험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겨우 집 한 채만을 얻었을 뿐이다.

집을 가지고 나서야 오로지 집 사는 일에만 몰두한 과거를 후회했다. 그렇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은 걸 선택했을 것이다. 내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저축과 대출의 무한궤도도 끝나고 40대를 맞이했다. 마음은 정승처럼 쓰고 싶은데, 그럴 돈이 없다. 몇 년 동안 쓸 생활비 정도는 있지만 그걸 정승처럼 썼다간 난 다시 개같이 돈을 벌어야 한다.


이제 개같이 돈 벌지 않아도 되는 것은 주식과 코인과 로또밖에 없다. 내가 쌔빠지게 저축과 대출의 무한궤도를 돌고 있을 때 남들은(존재하지만 어디에 존재하는지 모를) 미래를 내다보고 투자해서 몇 달 만에 수십억, 수백억을 벌었다. 그동안의 나의 노력은 순식간에 미련한 것이 되었다.

더 이상 돈이 목표인 삶을 살고 싶지 않다. 주식과 로또를 하는 정도의 노력만 하고 싶다. 다음 목표를 찾고 있다. 이번의 목표는 좀 더 부질없고 실패해도 괜찮은 일이면 좋겠다. 무엇이든 간에 한 번의 시도로 끝나는 일, 18년이나 애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면 좋겠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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