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가 불러일으킨 욕구
최근 다정해지고 싶은 욕구가 막 샘솟으려 했는데 운명인지 우연인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책을 발견했다.
동물에겐 한없이 친절한 INTJ인 나는(이런 거 좋아하는 편) 원숭이만은 좋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보노보만은 달랐다. 그들은 침팬지와 달리 공격적이지 않고 암컷, 수컷 구별 없이 성행위를 흉내 내며 친밀감을 표현한다. 그 행위가 인간인 내가 봤을 땐 민망해서 '보노보는 착하긴 한데 나한테도 붕가붕가 흉내 내자고 하면 그건 곤란한걸' 정도의 거리감을 느꼈었다.
책에 따르면 보노보는 붕가붕가만 하는 동물로 치부되기엔 너무나 훌륭한 종이 었다. 보노보 집단에서 수컷 우두머리는 없다. 암컷은 신체 열량의 막대한 부분을 새끼에게 쏟는다. 때문에 호전적인 수컷에 의해 살해되는 상황은 치명적인 손실이 되므로 무리 중 가장 친화적인 수컷을 선택한다. 게다가 암컷 보노보는 모든 암컷을 돕는데, 새로운 무리가 오면 서로 앞다투어 달려들어 인사하고 먹을 것을 내어준다.
반면 수컷 침팬지들은 힘으로 암컷을 제압하며 무리 안에 낯선 침팬지를 발견하면 우두머리를 포함한 여러 마리가 달려들어 잔인하게 살해한다. 불행히도 인간은 보노보보다 침팬지에 가깝다.
어쩌면 퇴사가 나의 다정함 욕구를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와 대화하는 모든 이들에게 다정하게 대하고 싶어졌다. 회사를 다닐 때는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그곳에서는 줄곧 어떻게 하면 저 인간들을 욕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욕을 해서 한방 먹이나 어떻게 깔아뭉개고 굴욕감을 주나 고민했었다. 내 속은 악으로 가득 차서 나를 물속에 집어넣으면 바닷속 물고기들을 모두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생각했었다.
아직 그 맘은 날 떠나지 않았다. 퇴사한 지 이제 4달이 넘었지만 아직도 회사 사람과 욕하고 싸우는 꿈을 꾸고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깬다. 나는 그 누구보다 그런 나 자신이 당황스러웠다. 도대체 언제까지 회사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건지 두려웠다.
그러나 다정한 종이 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는 것은 희망적이다. 우선 내 주위 인간들에게 다정해지기로 결심했다.
지난주 일요일 부모님과 함께 대전에 갔다. 윤영숙 이모의 딸 정현정의 결혼식이 있었다. 코로나 시국에 굳이 나까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진 않았지만 다정해지기로 했으니까 군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다짐은 아빠를 보자마자 첫 대화를 나누자마자 와장창 깨졌다.
아빠는 나를 보며 '왜 예쁘게 하고 오지 않았냐?' 고 했다. 나는 파르르 떨며 내가 왜 예쁘게 해 입어야 하냐고 결혼식 가는 거지 어디 멋 내러 가는 거냐며 파티하냐고 심지어 나는 이게 신경 쓴 옷차림이라고 꽥! 아빠는 이내 입을 다문다. 실패다.
결혼식은 주례 없이 성혼선언문을 낭독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내용이 정말 무릎을 탁 치게 만들었다. 신부가 말했다. 남편에게 성심성의껏 밥을 차려주겠다고. 신랑이 대답했다. 반찬투정 안 하고 차려주는 밥 맛있게 먹겠다고. 신부가 말했다. 몸 상하지 않게 건강식품을 잘 챙겨주겠다고. 신랑이 대답했다. 챙겨주는 거 잘 먹고 건강하겠다고.
들을 수가 없었다. 웨딩홀에서 제공한 그대로 읊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지만 그 내용을 미리 보고서도 그대로 읽었다는 것이 내겐 충격이었다. 31살 젊은 두 젊은이는 지금 뵈는 게 없는 것일까. 옆에 있는 외숙모에게 참지 못하고 열변을 토했다. 우와 이거 너무 시대착오적인 내용 아니예욧?!
거추장스러운 웨딩드레스를 입고 도움을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는 신부를 보는 것도, 신랑에게만 양가 부모님께 절을 시키는 것도, 신부에게만 오늘의 주인공, 오늘의 꽃이라 표현하는 것도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도 저런 짓을 했다니.
되돌아 갈수만 있다면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올림머리 대신 내게 찰떡인 커트머리를 하고 도우미 없이도 자유롭게 움직이는 드레스를 입고 아빠의 손 대신 신랑과 함께 당당하게 등장해야지. 아니 사실 결혼식 따윈 안 하는 게 맞다.
엄마는 4녀 3남 중 둘째다. 고로 집안에서 제일 어른 축에 속하는데 뷔페에서는 자연스럽게 엄마 주위로 집안의 어른들이 모이고 젊은 축에 속하는 무리들은 스르륵 주위로 흩어졌다. 회사에서 임원을 피해 다녔던 내 모습이 떠오르면서 부모님의 늙음이 피부에 와닿았다. 그렇게 나이 많지 않은데 속상했다. 그러고 보니 아빠의 얼굴에 파인듯한 검은색 반점이 보인다. 흉터냐고 물어보니 아빠는 '이거? 저승사자야'라고 말한다. 엄마가 '아이고 당신은! 그거는 저승꽃이지!!'라고 꽥! 아직 아빠에게도 저승꽃은 낯선 모양이다.
KTX역에 도착한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아빠의 주문으로 커피를 사들고 역 안으로 들어가서 아빠를 찾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겨울엔 블랙 컬러의 옷만 입는 건지 온통 블랙 인간들 뿐인 곳에서 역시 블랙을 입은 아빠를 엄마는 단박에 찾아낸다. 내가 엄마 남편이라고 한눈에 쏙 들어오나 봐라고 툭 던지듯 말하니 엄마는 뭐가 좋은지 깔깔거리고 웃는다.
종착역에 내린 후 부모님이 택시를 타지 않고 버스를 타고 갈까 봐 그들이 택시 정류장으로 향하는 것을 몇 번이나 뒤돌아 보며 확인한 후 지하철을 타러 갔다. 부모님은 나란히 서서 종종 걸어 나간다.
이번에 나는 부모님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야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오늘도 사진을 찍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후회했다. 좀 더 다정할 것을. 그리고 오늘도 사진 찍지 않았다고 후회할 날들이 계속 계속 이어지길 바랬다. 내가 진짜 다정해질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