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밀당하기
밤 12시 17분의 아파트 단지 안은 시간이 멈춰 있는 것 같다. 나뭇가지에 달린 이파리들이 조금이라도 흔들려 주었다면 시간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쉽게 알아챘을 텐데 유리 문진 안에 갇힌 것처럼 멈춰있다. 덥지도 춥지도 않다. 멈춰버린 세상에서 혼자 타박타박 걷는 기분이란 이런 것일 수 있겠구나.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오는 것이 얼마만 인지 모르겠다. 갑자기 내 안으로 행복이 들이닥쳤다. 그런 찰나의 순간이 오면 입술 꼬리가 나도 모르게 올라가 있다. 역시 술은 만취하지 않아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혼자인 것이 좋다.
어제도 술을 마셨다. 술을 꽤 좋아한다. 주사는 웃는 것인데 손뼉을 좀 방정맞게 쳐가면서 웃는다. 목소리가 커지고 제정신일 때 꼭꼭 숨겨두었던 나의 비밀을 자꾸만 폭로하려고 한다. 내가 폭로한 비밀의 강도에 따라 다음 날 금주 선언의 유무가 결정된다. 그리고 항상 금주는 실패다.
대학 1학년 때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소주 3병을 들이켰다가 지옥을 맛본 후 소주는 웬만하면 마시지 않았고 그 후로 2년에 한 번꼴로 지옥을 만났다. 술은 자의로 마셔야 즐겁다는 사실을 직장인이 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순진했던 나는 여느 때처럼 웃음이 넘쳤고 급기야 소주잔을 돌려 마시는 신기술을 방출하는 바람에 ‘너는 술을 마셔야 재밌다’며 회식 때마다 술을 강요당했다.
아무리 술을 좋아해도 회식 때마다 마시긴 싫었다. 아니 이제 술은 지긋지긋했다. 회사는 그토록 좋아했던 것도 이렇게 진저리 치게 만들어 버리는구나 싶었다. 급기야 나는 술은 단 한 방울도 마셔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는데 사람들은 나의 당돌함을 언짢아했지만 상관없었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내게 흥미를 보이지 않을 때쯤 다시 술을 마셨다. 하지만 웃음이 나올 만큼은 마시지 않았다.
술만 마시면 웃었는데 우는 날도 생기기 시작했다. 우는 모습을 본 사람이 손에 꼽을 만큼이라는 건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보통 혼자 있을 때 엄청 추하게 우는데 이유는 뭐가 되었든 결국 ‘공허’해지기 때문이었다. 나는 평소에 잘 울지 못한다. 슬픈 영화를 보면 나도 슬퍼 죽겠는데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나오기 직전에 뭔가가 눈물샘을 꽉 부여잡고 잡아당기는 느낌이 든다. 그러고 나면 내 슬픔이 억지같이 느껴져서 눈물이 쏙 들어간다. 그래서 술을 마시고 펑펑 울 때면 속이 시원한 느낌이 든다. 나도 울 수 있구나. 울 수 있는 인간이구나.
그런데 그렇다고 그 눈물은 진짜일까. 그럼 내 웃음도 진짜일까. 그때의 내 감정이 진짜 나의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마치 시간이 멈춰 있을지 모른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술이 만들어낸 가짜가 아닐까.
지금껏 술을 마시면 내 감정은 진짜고 다만 풍선처럼 부풀려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술만 마시면 그렇게 제주도에 가고 싶어서 당장이라도 공항으로 뛰쳐 갈 것처럼 말해놓고 자고 일어나면 아우 미쳤네 제주도는 무슨 하는 나를 보며 이건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이제는 비밀을 폭로하지 않아도 후회스럽고 찜찜한 기분이 든다. ‘술 취했을 때의 내 감정’에 취해 술을 마셨던 내가 이제는 그 감정을 견제하며 그 감정에 속지 않으려 취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술을 마시는 걸 알았다. 아니.. 그럼 안 마시면 되는 건데 왜 나는 꾸역꾸역 마시는 거지? 아마도 주정뱅이는 이렇게 취하는 즐거움마저 달아나는 것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